[서독의 기억] ⑭"동독주민 삶에 대한 무관심, 현재 사회문제 낳아"
통일 후 동독 주민 대상 비밀조사 연구결과 묻혀
민간교류 속 표본증가로 신뢰도 증가…장벽붕괴 전 동독 경제상황 악화
비밀조사 예산 계속 증가…당국서 조사 포인트 추가 요청 오기도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ㆍ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7∼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번이 네 번째 시리즈로, 독일 사회가 당면 문제 해결을 위해 다시 돌아보는 '동독의 기억'에 대한 2개의 기사를 이틀간 연재합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⑬北보통사람 내면은…22년간 서독이 조사한 '동독의 기억' 소환
⑭"동독주민 삶에 대한 무관심, 현재 사회문제 낳아" ←←←
(뮌헨·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동서독 분단기 서독 당국의 의뢰로 동독 주민의 인식을 조사해온 안네 쾰러(86)는 당시 대(對)동독 정책 관련 컨퍼런스에서 토론을 듣고 있으면 한숨이 나오기 일쑤였단다.
눈앞에 동독에 대한 틀린 정보를 토대로 논의가 오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조사의 결과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를 서독 당국이 극도로 비밀에 부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쾰러는 당시 뮌헨에 근거를 둔 유력 여론조사기관 인프라테스트가 22년간 동독 주민을 대리조사한 비밀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다.
쾰러는 인프라테스트 사장에 오른 뒤에도 이 비밀조사를 챙겼다.
쾰러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통일 이후 비밀조사 프로젝트의 연구결과가 전혀 활용되지 못하고 창고에 쌓인 채 세월을 보낸 데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동독 사람들의 삶에 무관심한 채 미래에 치중하다 보니, 현재 사회로까지 문제점을 안고 가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당시 조사결과 "동독의 핵심 지지층을 제외하면 대체로 동서독 긴장 완화 및 교류확대에 지지를 보냈다"면서 "교류·확대는 동독체제 자체에 직접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독 당국은 내부에서 불만이 쌓일 경우 서독에 대한 여행규제를 완화하는 조치 등을 취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당시 민간교류가 늘어가는 과정에서 "동독 주민이 서독에 대한 너무 긍정적인 이미지만 갖게 된 것은 부작용"이라며 "동독 주민은 서독 사람들이 힘들게 노동력을 투입해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쾰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 이전의 동독 상황에 대해 "동독 당국이 채무를 남발했고, 경제 상황이 계속 악화했다"면서 "조사결과 체제에 대한 불만 세력이 급격히 많아졌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 2015년에 인프라테스트의 조사 내용을 간추린 책을 냈다.
▲ 중요한 내용이 많이 빠져 있다. 애초 1990년대에 다른 방식으로 책을 출판하려 했는데, 개인적 사정으로 작업이 미뤄졌다. 인프라테스트 비밀조사의 원본은 라이프니츠 연구소로 이관돼 있다. 다시 처음부터 분석하려는 작업이 시작되려는 참이다.
-- 통일기 동서독 사람들의 상대방에 대한 기억에서 잘못된 점은.
▲ 통일 후 서독 주민은 동독 주민의 살아온 방식을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채 앞만 보고 성급하게 나아간 게 실수였다. 동독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다 뭉뚱그려졌다. 현재 불거지는 문제들은 이런 탓이 크다. 서독의 자유민주주의에는 여러 규칙이 있고, 여러 어려운 점도 있는데 동독 사람들은 서독 사람들의 높은 소비 수준과 자유로운 여행 등의 장점에 주목했다. 동독 주민은 서독 사람들이 힘들게 노동력을 투입해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를 보지 못했다. 또, 소수 저항세력을 제외한 보통의 동독 주민도 당시 공개적으로 체제 비판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1980년대 후반 심각한 경제적 난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던 상황이 겹쳐져, 결국 주로 좋았던 체제의 산물이 동독의 기억으로 남게 됐다. 통일기에 동서독 양쪽 모두에 실수가 있었다.
-- 동서독 분단기 서로에 대한 관심은
▲ 동독 사람들의 80∼90%는 서독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반면, 서독 사람들은 15∼20% 정도만 동독에 관심을 두고 있다. 동독에 관심을 둔 서독 사람들은 탈동독민이거나 동독에 친척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 인프라테스트에 비밀조사를 의뢰한 1968년은 당시 보수적인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이 진보적인 사회민주당을 소수 파트너로 삼아 연립정부를 구성할 때였다. 비밀조사를 하게 된 배경은.
▲ 연정에서 사민당 출신의 헤르베르트 베너 전독부(이후 내독부·한국의 통일부 격) 장관이 조사를 기획했다. 동독 당국이 1961년 동서 베를린 경계에 쌓은 베를린 장벽과 1953년 6월 동독 노동자 봉기를 서독 당국이 예측하지 못했는데, 동독을 모른다는 반성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동독에 대한 신뢰성 있는 설문조사가 없었다. 서독으로 넘어오는 많은 정보는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의 손을 거친 게 많았다. 서독 당국이 조사를 비밀에 부친 것은 동독과의 외교적인 긴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조사결과는 신뢰성이 있었나.
▲ 동독을 방문한 서독 사람들을 통한 대리조사였다. 서독 사람들을 인터뷰해 접촉한 동독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것이었다. 과연 신뢰성 있는 결과가 나올지에 대한 의구심도 당연히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민간교류가 확대되면서 동독 사람들과 접촉하는 서독 사람들이 많아졌다. 표본이 늘어나면서 신뢰도가 높아진 것이다. 동독 주민은 감시에 대한 우려로 서로 진심을 털어놓는데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주로 친척 등으로 신뢰 관계가 있었던 서독 방문객들에게는 동독 당국의 지침과는 상반되게 내면을 드러내는 경향을 보였다. 대리조사가 성공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다.
-- 서독의 신동방정책, 동서독 간 협상에 대한 동독 주민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 동독의 에르푸르트에서 열린 동서독 정상회담 당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에게 동독 주민이 환호성을 보냈는데, 이는 브란트 총리의 개인적인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브란트 총리가 추진한 동서독 화해·교류 정책에 대해 전반적으로 지지를 보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동독 사람들은 서독 방문객을 전반적으로 환영했다. 서독 사람들을 친인척으로 둔 동독 주민은 이웃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 인프라테스트의 일부 조사결과를 들여다보니, 교류·협력이 진전된 이후 동독 정부에 대한 반감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 때문에 동독 정부가 큰 부담없이 교류·협력에 나서지 않았나 하는 추정도 해본다.
▲ 1970년대 초에는 동독체제의 지지층이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동독체제의 공고함 때문에, 서독이 상대방을 인정하고 신동방정책을 실시한 셈이다. 다만 1970년대 동독의 서기장 교체 이후에도 동독의 경제적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아 실망감이 커지면서 체제 반대자들이 많아지는 추세였다.
교류·확대는 동독체제 자체에 직접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983년 서독의 보수정권이 동독에 차관을 제공한 데 대해 동독 시민의 반응은 엇갈렸다. 차관 제공을 반대한 시민들은 체제 반대파들이었다. 차관 제공이 경제적으로 약화한 동독체제를 안정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 교류·협력 확대의 영향력이 왜 제한적이었나.
▲ 동독 당국은 내부에서 불만이 쌓일 경우 서독에 대한 여행규제를 완화하는 조치 등을 취했다. 불만이 개혁에너지로 전환돼 폭발하지 않도록 관리한 셈이다. 그러나, 서독을 방문한 동독 시민은 서독의 생활 수준을 직접 목격하고선 동독체제에 불만을 품는 경우가 많았다. 개방정책으로 동독 정부에 부담이 가해진 게 사실이나, 동독체제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결정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 서독 사람들의 반응도 같이 조사했는데, 동독에 대한 불만은 어땠나.
▲ 동독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이뤄질 때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 통일 2∼3년 전에도 동독에 대한 반감 정서가 커지기도 했다.
-- 교류·협력 확대 후 서독에 대한 동독 주민의 인식 변화는.
▲ 동독 지역에서는 서독 생활에 대해 동경이 많았다. 미디어의 영향이 컸다. 동독의 집권 사회주의통일당(SED) 핵심 지지층을 제외하면 대체로 동서독 긴장 완화 및 교류확대에 지지를 보냈다. 그런데, 부작용도 있었다. 동독 주민이 서독에 대한 너무 긍정적인 이미지만 갖게 됐다.
-- 조사자료에서 1989년도 동독체제에 대한 불만이 급증했다.
▲ 동독 당국이 채무를 남발했고, 경제 상황이 계속 악화했다. 체제에 대한 불만 세력이 급격히 많아졌다.
-- 조사한 내용을 당국에 어떻게 보고했는가.
▲ 정기적으로 보고서로 만들어졌다. 극도의 보안이 필요했던 만큼, 보고서는 5부만 만들어져 총리실에 2부, (우리나라의 통일부 격인) 내독부에 2부, 서베를린 시(市)정부에 1부가 전달됐다. 내독부 프로젝트인데도, 내독부가 영향력을 많이 행사하지 못한 것 같다. 내독부 산하 전(全)독일문제연구소장을 20년 가까이 지낸 데틀레프 퀸도 조사 자체를 몰랐다고 한다.
통일 국면에서 협상을 주도한 것은 총리실이었다. 헬무트 콜 총리의 본능에 따른 과감한 결단으로 협상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내독부는 더 소외됐다. 그래서 비밀조사 프로젝트도 더 소외된 것 같다. 통일 국면에서 동독 사람들에 대한 내면 연구결과가 활용되지 못하고 동독 사람들의 삶에 무관심한 채 미래에 치중하다 보니, 현재 사회로까지 문제점을 안고 가게 된 것이다.
분단기, 통일기의 경험이 자식 세대로 전해진다. 당시 동독에서 중요한 일을 했던 많은 시민이 대거 직장을 잃었다. 실업급여와 사회부조를 받으며 패배자가 된 것 같은 모습을 자식 세대가 보고 자랐다. 당시 어른의 경험은 그들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아이들의 경험이 된 셈이다. 이런 경험은 기억으로 자리잡아 3대까지 이어질 수 있다.
-- 서독 당국은 보고서를 어떻게 활용했는가.
▲ 우리는 보고서를 올리기까지 역할만 했기 때문에 실제 어떻게 사용됐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1980년대에 계속 예산이 늘었다. 작은 예산도 아니었는데, 예산을 늘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서독 당국 측은 서독 방문객의 동독 통행 요금 등 동독에서 필요한 조사 포인트에 대해 요청해오기도 했다. 조사결과가 서독 정부 내에서 참고되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이 조사가 다른 동독에 대한 정보와의 차별점은.
▲ 분단기 서독의 정치인이나 기관들이 동독 측과 접촉한 뒤 선별된 이미지를 가지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인프라테스트의 조사는 동독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제대로 파악했다. 지금이라도 이런 연구결과를 독일 사회에서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활용해야 한다.
-- 현재 사회에서는 당시 방식의 조사가 비밀리에 이뤄지기 쉽지 않을듯하다.
▲ 한국의 상황을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북한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고 있지 않을까. 한국 측에서도 북한에 대해 조사를 한다면, 두 가지를 이야기해주고 싶다. 조사자나 대리조사자가 북한 사람과 만날 때 공식적인 느낌을 줘서는 안 된다. 공식적이면 자기검열을 한다. 또, 그 질문에 조사하는 사람의 시각이 반영된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쾰러는 바이에른주(州) 뮌헨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 비쎈이라는 소도시에 살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친 뒤 기차로 비쎈에서 뮌헨으로 가는 길에 투칭과 슈타른베르크라는 소도시를 지나게 됐다.
투칭은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핵심 참모로 신동방정책의 기초를 설계한 에곤 바가 1963년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정책 구상을 대중에게 처음으로 밝힌 '투칭 연설'이 이뤄진 곳이다.
이후 브란트가 1969년 총리에 오른 뒤 신동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돼 동서독 교류·협력이 획기적으로 늘어 통일의 기초가 닦여지게 됐다.
기차가 투칭을 지난 뒤 도시 간 연평균 가처분소득 격차에 대한 당일 보도된 독일 언론 기사를 읽던 중 고개를 들어보니 슈타른베르크역에 정차해 있었다.
마침 기사에서는 슈타른베르크가 연평균 가처분소득이 독일 401개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나왔다. 작년에 1인당 3만4천987유로였다.
특히 연평균 가처분 소득이 2만 유로를 넘은 옛 서독지역 도시는 284개인데 반해, 옛 동독지역 도시가 6개뿐이라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독일 정부는 매년 통일백서를 내고 옛 동독지역의 경제적 향상과 옛 동서독 지역 간 격차 감소를 강조한다.
올해도 향상된 수치를 내놓을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은 갈 길이 먼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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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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