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가위' 핵심 단백질, 세균 발병 유전자 억제 확인"
미국 에모리대·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 보고서
(서울=연합뉴스) 한기천 기자 = 흔히 '유전자 가위'로 알고 있는 크리스퍼(CRISPR)는 '주기적 간격으로 분포하는 짧은 회문(回文)구조의 반복서열'이란 뜻을 가진 영어 단어들의 머리글자다. 여기서 회문구조(palindrome)란, DNA 염기서열이 역순으로 배치돼 앞뒤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똑같이 읽히는 구조를 말한다.
이 특이한 구조의 반복 염기서열은, 대장균의 단백질 유전자를 연구하던 일본 오사카대 연구진이 1987년에 우연히 발견했다. 그러다가 1994년 세균 유전체 지도가 처음 공개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여러 세균의 유전체에 동일한 회문구조가 존재하고, 종전엔 몰랐던 21개의 염기서열이 그 구조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게 밝혀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과학자들은 회문구조와 이 21개 염기서열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크리스퍼'라는 이름만 붙였을 뿐 별다른 진전은 보지 못했다.
지지부진하던 상황의 돌파구는, 2007년 세균의 적응면역을 처음 발견한 덴마크 다니스코(요구르트 회사) 과학자들에 의해 열렸다.
베일에 싸여 있던 21개 염기서열이 세균의 적응면역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이들 염기서열에서 세균에 감염하는 박테리오파지(약칭 파지·살균 바이러스)의 DNA가 발견된 게 기폭제였다.
하지만 크리스퍼가 '유전자 편집 가위'의 명성을 얻게 된 건, 2012년 크리스퍼의 적응면역에 결정적 작용을 하는 'Cas9' 단백질이 발견되면서부터다.
당시 미국 버클리대의 제니퍼 다우드나 교수와 독일 하노버대의 에마누엘에 하르펜티어 교수가 이끈 공동연구팀이, 세균에서 'Cas9'을 찾아내 저널 '사이언스'에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들 두 과학자는, 세균의 21개 염기서열에 있는 파지 DNA가 RNA로 전사되면, Cas9이 이 RNA와 결합해 침투한 파지 DNA를 자른다는 걸 발견했다.
아울러 Cas9과 결합하는 RNA를 바꾸면 다른 유전자 서열을 잘라낼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기존의 방법보다 훨씬 더 효율성이 높은 현재의 유전자 편집 기술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런데 이 Cas9 단백질이 유전자를 자르지 않고도 세균의 질병 유전자 활동을 억제한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병원성 프란시셀라 노비시다(Francisella novicida) 박테리아가 질병을 일으킬 때 비발현 상태에 있어야 하는 유전자들을 Cas9이 제어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미국 에모리대 항생제 내성 연구센터 소장인 데이비드 웨이스 감염병 교수와 Cas9의 발견자 중 한 명인 하르펜티어 박사가 주도했다. 하르펜티어 박사는 현재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병원체 부서 책임자로 있다.
연구결과를 담은 보고서는 저널 '몰레큘러 셀(Molecular Cell)'에 최근 게재됐다.
1일(현지시간) 에모리대 측이 온라인(www.eurekalert.org/pub_releases/2019-07/ehs-sgs070119.php)에 공개한 연구 개요에 따르면 F.노비시다는, 들토끼병을 일으키는 같은 프란시셀라 속의 F.툴라렌시스(F.tularensis)와 가깝지만, 인간에게 병원성이 있는 건 F.툴라렌시스다.
연구팀은, Cas9이 F.노비시다의 유전자 중 단 네 개만 제어하지만, 이 세균이 질병을 일으키려면 이들 네 개 유전자가 모두 비발현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걸 확인했다.
또한 세균의 질병 유전자를 차단할 때 Cas9은 염기서열이 다른 RNA와 결합했고, 이렇게 되면 가위의 길이가 짧아져 유전자를 자를 수 없게 됐다. Cas9은 다른 유형의 세균이 질병을 일으키는 데도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관찰됐다.
보고서의 제1 저자인 에모리대의 하나 라트너 연구원은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에서 Cas9이 폭넓게 유전자를 온·오프 할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라면서 "Cas9의 이런 전사 억제 능력이, 수많은 Cas9 표적이 아직 미발견 상태인 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che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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