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미투' 연극계…여성연극인 눈엔 얼마나 달라졌을까
'페미니즘연극제' 여는 나희경 페미씨어터 대표·장지영 드라마투르그 인터뷰
"성 평등 이뤄져 이런 연극제 필요 없는 세상 꿈꿔요"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연출가 이윤택의 성폭력을 계기로 시작된 연극계 '미투'(#MeToo. 나도 당했다) 운동이 이달 말 500일을 맞는다.
그동안 연극계는 자정 노력을 했다. 피해자들은 숨겨온 이야기들을 털어놨고, 일부 가해자들은 퇴출당했다. 유사강간치상 등 혐의로 기소된 이윤택은 2심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한국연극협회는 미투 의혹이 불거진 뒤 이름을 바꿔 대한민국연극제에 참여한 극작가 김지훤을 제명했다.
남은 사람들은 새 판을 짜고 있다. 서울연극센터는 지난 3월부터 '미투 이후 1년, 연극은 달라졌는가?'를 주제로 배우, 연출가, 스태프, 관객 등 다양한 관계자들과 좌담회를 진행 중이다. 젊은 연극인들은 아예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연극제를 론칭했다. 단발성 분노를 넘어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려는 움직임이다.
제2회 '페미니즘 연극제'를 여는 나희경(31) 페미씨어터 대표를 16일 종로구 수송동에서 만났다. 연극제는 오는 20일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일대에서 열린다.
대학로 극단과 남산예술센터를 거친 나 대표는 2013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지난해 장지영(33) 드라마투르그 등과 의기투합해 페미니즘 연극제를 론칭했다. 젊은 두 연극인은 "궁극적으로 성 평등한 세상이 와서 이런 연극제가 필요 없어지길 바란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다음은 나희경 대표·장지영 드라마투르그와 일문일답.
-- 연극계 미투 이후로 무엇이 달라졌나요?
▲ (나희경) 변화의 폭이 꽤 큰 것 같아요. 일단 여성 서사 작품이 양적으로 확 늘었어요. 제작자 사이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도 늘었고요. 올해 연극제에 참여하는 한 남성 감독님은 원래 이런 주제를 잘 모르던 분인데, 주변에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하시더라고요. 비록 이런 움직임이 소수일지라도 요즘 연극계에서 뚜렷한 하나의 흐름인 걸 부인할 수 없어요.
▲ (장지영) 관객들이 젠더 감수성이 결여된 작품은 보고 싶어 하지 않으세요. 작품 전개상 쓸데없는 강간장면 등을 넣으면 당장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관객 후기가 티켓 판매량과 직결되니 연출자들도 신경을 안 쓸 수 없죠. 설령 연출자가 속마음으로는 그런 관객 반응에 동의하지 않더라도요.
-- 작년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를 열 때는 절박한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그때 분위기는 어땠어요? (※이윤택 연출가 성폭력 사건은 2018년 2월 14일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의 온라인 글로 처음 점화됐다. 연극제는 그로부터 넉 달 뒤 열렸다.)
▲ (나희경) 저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을 알아가기 시작했는데요. 2016년 말부터 그런 이슈로 공부하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러다 이걸 연극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마침 미투 운동이 점화됐죠. 저도 마음에 화가 많았고 관객들께서도 마찬가지였나 봐요. 작품이 별로여도 '우쭈쭈' 해주셨고, 좋은 작품에는 더 뜨거운 응원을 보내주셨죠. 정말 든든했어요.
-- 연극제 타이틀 전면에 '페미니즘'이라는 문구를 쓰셨잖아요. 여성 혐오에 대한 논쟁이 치열한 와중에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요.
▲ (나희경) 그때는 '왜 페미니즘을 페미니즘이라 이야기하지 못해?'라는 생각이 가장 컸어요. 2회를 맞은 지금은 고민되긴 해요. 결국 저변을 넓히는 게 중요한데 페미니즘에 반감이 있는 분들은 보러오기 힘드실까 봐요. 관객의 폭을 확장하느냐, 아니면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분들끼리 담론을 깊이 가져가느냐를 놓고 고민이 많아요.
--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과연 약자냐, 여성 혐오는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어요. (※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7월과 11월 20·30세대의 성 평등 현안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일상생활에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차별의 심각성에 대한 질문에 20대 여성은 7월에 79.3%, 11월에 73.5%가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20대 남성은 7월 42.6%, 11월 33.1%로 같은 대답을 했다.)
▲ (장지영) 일각에선 여학생이 학업 성취도가 더 높고 각종 시험 합격률도 더 높다고들 하죠. 그런데 그 공부 잘하던 애들은 다 어디 갔죠? 왜 대학교수, 고위 공무원, 회사 임원 절반은 여자가 아닌가요. 어쩌면 이야기의 초점이 20·30대 젊은 여성에게만 맞춰진 것일지도 몰라요. 심지어 젊은 여성들도 자신은 불평등을 겪어본 적이 없다고 느끼거든요. 하지만 여성의 인생은 30대에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존재해요. 약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특정 시기'에만 이목이 쏠린 게 아닌가 싶어요. 20·30 미혼 여성만 '여성'이라는 건가 생각도 들고요.
--올해 연극제에서는 이런 고민을 담아낸 작품이 많나요? 포스터를 보니 머리가 짧은 여성, 긴 여성, 안경을 낀 여성 등 다양한 연령과 직업의 여성을 표현한 것 같아서 흥미로웠는데요.
▲ (나희경) 참가작은 모두 다섯 편이에요. 극단 종이로만든배의 '코카와 트리스 그리고 노비아의 첫날밤', 프로덕션IDA의 '마음의 범죄', 907의 '너에게', 프로젝트그룹 원다원의 '남의 연애', 극단 문의 '달랑 한 줄' 등이 있어요. 그리고 출산과 육아에 따른 경력단절을 극복하고 복귀한 여성 연극인 사례조사 발표회, 네트워킹 프로그램도 있어요.
--약간의 스포일러도 해주세요.
▲ (나희경) 모두 재미난 작품이라 어떤 걸 소개해야 할지…(웃음). 그럼 20대 후반 연극인들이 만든 '남의 연애'를 말씀드릴게요. 가스라이팅(gaslighting·타인의 심리와 상황을 조작해 자신을 의심하게 하는 행위)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요. 실제로 20대들을 인터뷰해서 시나리오를 썼어요. 작품 속 가해자는 연인 관계인 피해자를 학대하면서도 마치 피해자가 잘못했으니 당연한 벌을 받는다는 식으로 세뇌해요. 하지만 물리적 폭력이 없다면 제삼자가 개입하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남 일처럼 그런 폭력을 놓치는 게 아닐까 해요.
▲ (장지영) 이외에도 흥미로운 작품이 많아요. 개막작 '코카와 트리스 그리고 노비아의 첫날밤'은 여성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두려움을 다룬 블랙코미디인데 정말 재미있어요.
--연극제 개최까지 우여곡절도 많았을 것 같아요. 재정적으로도 어렵진 않았나요?
▲ (나희경) 작년에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 1천500만원을 목표로 후원을 받았어요. 처음엔 지인들이 많이 도와줬는데, 500만원쯤 도달했을 때부터 더 안 늘더라고요. 연극제 자체가 무산될까 봐 얼마나 조바심이 나던지. 그러다 미투 운동이 시작되면서 후원금이 마구 올라갔어요. 올해도 텀블벅으로 관련 자금을 모으고 있는데요, 사실 이런 형태로는 지속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요. 텀블벅 사용은 내년이 마지막일 것 같고, 이후로는 더 체계적인 펀딩이 필요할 것 같아요.
-- 올해 연극제 주제가 '연대'이던데 크라우드 펀딩이라는 방식과도 일맥상통하네요.
▲ (나희경) 맞아요. 처음 미투 발언을 한 건 한 명이었지만 모두가 힘을 합치면서 변화를 끌어냈잖아요. 앞으로도 이렇게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극제도 사실 '나도 누가 좀 필요해요, 함께해주세요'라고 손을 흔드는 것이거든요.
-- 앞으로 연극제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나요.
▲ (나희경·장지영) 저희끼리 농반진반 그런 말을 해요. 연극제가 없어지는 게 목표라고요. 궁극적인 성 평등을 이뤄지면 이런 연극제가 필요 없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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