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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톈안먼 시위는 중국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차이야오창 지련회 부주석 "민주주의·정의 위해 싸운 인민의 투쟁"
"홍콩, 중국인에 톈안먼 시위의 진실 알리는 데 중심적 역할 할 것"



(홍콩=연합뉴스) 안승섭 특파원 = "6·4 톈안먼 시위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싸운 투쟁입니다. 다만 그 이후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지극히 다른 모습을 보였을 뿐입니다."
1일 홍콩 몽콕 지역의 '6·4 기념관'에서 만난 차이야오창(蔡耀昌·50)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이하 지련회) 부주석은 6·4 톈안먼 시위의 의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1989년 당시 톈안먼 시위를 지지하는 시위를 홍콩에서 주도했던 시민단체들이 연대해 결성한 지련회는 매년 6월 4일 밤 홍콩에서 톈안먼 시위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지난해 톈안먼 시위 추모 촛불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11만5천여 명의 인원이 참가했다. 톈안먼 시위 30주년을 맞는 올해에는 참가 인원이 훨씬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톈안먼 시위 당시 홍콩에서 일어난 지지시위를 주도했던 학생운동 지도부 중 한 명이었던 차이 부주석은 이후 30년 가까이 시민운동에 몸담으면서 홍콩과 중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옹호 등을 위해 싸워왔다.
차이 부주석은 "톈안먼 시위와 광주민주화운동은 인민이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싸웠다는 점, 정부가 군인들을 동원해 강제진압했다는 점,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는 점 등에서 여러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역사의 전개 과정은 확연히 달랐다고 차이 부주석은 지적했다.
그는 "한국은 시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몰아낸 후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공산당 일당 지배하의 중국은 아직도 톈안먼 시위의 진실을 은폐하고 모든 것을 감추기에만 급급하다"고 비판했다.
당시 덩샤오핑(鄧小平)을 중심으로 한 중국 지도부는 톈안먼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규정했으며, 아직도 이러한 시각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톈안먼 시위의 희생자가 군경을 포함해 총 241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희생자 수가 수천 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우얼카이시(吾爾開希) 등 톈안먼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운동 지도부 중 일부는 홍콩을 거쳐 대만, 미국, 유럽 등 다른 나라로 망명하기도 했다. 이는 톈안먼 시위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뜨거운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련회 등은 톈안먼 시위 지도부가 해외로 망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줬으며, 이들이 국외로 망명시킨 중국 반체제 인사는 100명을 훌쩍 넘는다.
차이 부주석은 "톈안먼 시위 당시 수많은 사람이 홍콩 도심으로 쏟아져 나와 톈안먼 시위를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며 "톈안먼 시위가 절정에 이르렀던 5월 말에는 시위 참여 인원이 150만 명에 달했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1989년 5월 20일 홍콩에 대형 태풍이 불어닥쳤음에도 4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다음날인 21일에는 시위 참여 인원이 100만 명으로 늘었고, 22일에는 무려 15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홍콩의 인구가 560만 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홍콩인들의 톈안먼 시위에 대한 지지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 수 있다.
차이 부주석은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가 보장된 홍콩의 특별한 지위를 이용해 홍콩인들은 중국 본토인들에게 톈안먼 시위의 진실을 알리고자 온 힘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톈안먼 시위의 진실을 감추고자 하는 중국 정부는 사람들이 이를 잊기를 원하겠지만, 홍콩인들은 이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며 "홍콩은 톈안먼 시위의 진실을 알리는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차이 부주석이 입은 티셔츠에는 '인민은 잊지 않을 것이다(人民不會忘記)'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지련회가 주도해서 건립한 6·4 기념관 또한 톈안먼 시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념관에는 톈안먼 시위 당시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 세웠던 조각상을 본뜬 '민주 여신상'과 단식 투쟁 사진, 군인들의 시위 진압 장면이 담긴 영상, 희생자 위치가 표시된 지도 등이 전시돼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톈안먼 시위 때 인민해방군의 총에 맞은 뒤 19년간 그 총알이 몸속에 박힌 채 살아야 했던 중국 민주화 운동가 장젠(張健)의 유품이었다.
톈안먼 시위 당시 베이징체육학원에 재학 중이던 장젠은 시위 학생들을 지키는 규찰대 대장을 맡았으나, 1989년 6월 4일 광장으로 진입하던 군인에 의해 오른쪽 대퇴부 등에 총알을 맞았다.
이후 12년간 이름을 바꾼 채 중국에서 숨어 살다가 2001년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2008년 파리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때까지 19년간 몸에 총알이 박힌 채 살았다.
그의 몸에서 나온 총알과 이를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 그가 쓴 헬멧 등은 이후 6·4 기념관에 기증됐다.
장젠은 프랑스에서 민주화단체 '민주중국전선' 부주석을 맡아 소식지 발행과 강연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지난 4월 15일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은 후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48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홍콩 고등학생 20여 명이 기념관을 찾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들 중 한 명인 씬잉이(17) 양은 "톈안먼 시위의 진실을 알고 싶어 친구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기념관을 찾아왔다"며 "군인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을 잔인하게 진압한 것은 비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와 함께 기념관을 찾은 룸싱윈(17) 양은 "중국 정부는 온라인에서 톈안먼 시위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고 교과서에도 관련 내용을 거의 싣지 않는 등 그 진실을 숨기고자 애쓰고 있다"며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중국 본토의 청소년은 톈안먼 시위의 진실을 알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나중에 중국 본토의 또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면 이들에게 톈안먼 시위의 진실을 말해주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씬잉이 양은 "톈안먼 시위의 진실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중국 정부의 '세뇌교육'으로 인해 중국 본토의 학생들이 이를 믿을지는 모르겠다"며 "하지만 이들도 언젠가는 역사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ssah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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