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주년 노동절…한국 '노동존중사회' 어디까지 왔나
최저임금·노동시간 단축 등 역풍…'노동인식 전환' 긍정적 평가도
"노동시장 토대 급변 놓치면 큰 문제 직면…미래지향적 제도 갖춰야"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오는 5월 1일은 제129주년 세계 노동절이다.
노동절은 1886년 5월 1일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하루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할 것을 요구한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의 총파업에서 유래한다.
당시 경찰은 시가행진을 벌이던 노동자들에게 총을 쏴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세계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1889년 제2인터내셔널 창립 대회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 세계로 확산하기 위해 5월 1일을 세계 노동절로 정했고 이듬해 5월 1일 세계 각국에서 최초의 '메이데이'(May Day) 행사가 열렸다.
한국에서는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8년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 창립 기념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했고 박정희 정부는 노동 개념에 내포된 계급 의식을 희석하고자 '근로자의 날'로 명칭을 변경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급격히 성장한 노동계는 노동절의 본래 의미를 되찾기 위해 5월 1일로 바꿀 것을 요구했고 1994년 근로자의 날은 5월 1일로 정해졌다.
노동절은 노동자의 권익이 얼마나 향상됐는지, 노동 기본권이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지 돌아보는 날이다.
2019년 노동절을 맞아 노동계는 문재인 정부의 '노동존중사회' 공약이 얼마나 제대로 집행되고 있느냐는 질문을 제기한다.
◇ 노동계, 최저임금·노동시간·ILO 협약 모두 불만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사회 실현을 국정과제로 내걸고 노동자 권익을 위한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쉬운 해고와 취업규칙 일방 변경을 허용한 박근혜 정부의 '양대 지침'을 그해 9월 폐기한 것은 노동존중사회 실현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조치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재인 정부는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을 달성한다는 공약을 내걸었고 최저임금위원회는 2018년 적용 최저임금을 시간당 7천530원으로 16.4% 인상했다.
작년 3월에는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1주 최대 노동시간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했다. 2016년 기준으로 2천52시간에 달하는 연간 노동시간을 2022년까지 1천800시간대로 단축해 '과로 사회'에서 탈출한다는 국정과제에 따른 것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했고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에 착수했다.
노동자 단결권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기 위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도 노동존중사회 실현을 위한 공약이다.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작년 7월 ILO 핵심협약 기준에 따라 국내 노동관계법을 개정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임기 중반이 다가온 시점에서 노동존중사회 공약 이행 상황에 대한 노동계의 평가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다.
최저임금 인상의 경우 노동계는 지난해 최저임금법 개정으로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확대되면서 인상 효과가 반감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기상여금과 복리후생비의 일부가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포함돼 최저임금 인상의 영향을 받는 일부 저임금 노동자의 기대 이익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작년 7월 올해 적용할 최저임금을 8천350원으로 10.9% 인상했으나 2020년 최저임금 1만원 달성 공약은 사실상 실현이 불가능해졌다.
정부가 올해 1월 발표한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 방안은 최저임금 인상 정책 후퇴의 '결정판'이 될 것으로 노동계는 우려하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도 후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작년 7월 3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주 52시간제 시행에 들어갔지만, 정부는 계도기간을 설정해 처벌을 유예했고 경영계 요구에 따라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을 추진했다.
경사노위는 지난 2월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최장 6개월로 연장하는 사회적 합의를 내놨지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 정부가 내놓은 후속 조치는 일부 불가피한 면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특히, 과도한 임차료와 카드 수수료 등 소상공인과 영세자영업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충격이 컸고 정부는 어떻게든 이를 완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정부의 전략은 처음부터 잘못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받는다.
정부는 ILO 핵심협약 비준에 앞서 국내 노동관계법부터 개정한다는 이른바 '선(先) 입법 후(後) 비준' 로드맵을 세웠고 경사노위는 노동관계법 개정 논의에 착수했으나 노사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집권 초기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ILO 핵심협약 비준을 밀어붙이지 않고 사회적 대화에 맡긴 탓에 '골든 타임'을 놓쳤다는 비판이 노동계에서 나온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도 노동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정부가 일부 비정규직에 대해 도입한 자회사 채용 방식은 비정규직의 연장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정규직화 3단계인 민간 위탁 사업은 기관별 자율 검토에 맡겨 정규직화를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해석됐다.
◇ 노동에 대한 편견은 깼다…미래 노동시장 변화 대비도 필요
문재인 정부의 노동존중사회 실현 공약이 일부 후퇴한 데는 경제위기론의 영향이 컸다.
특히, 지난해 월별 취업자 증가 폭을 포함한 고용지표가 눈에 띄게 악화하자 '고용 쇼크' 우려가 확산했다.
고용 위기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탓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생산가능인구 감소와 같은 구조적 요인 때문이라는 정부의 설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최저임금 인상이 실제로 고용에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는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지만, 최저임금 인상은 고용 위기를 넘어 경기 부진의 주범으로 인식됐다.
최저임금 인상을 포함한 노동존중사회 정책 전반이 비판의 대상이 됐다. 정부가 더는 노동계에 끌려다니지 말고 과감하게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문도 제기됐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이 강한 역풍을 맞아 일부 후퇴한 면도 있지만, 노동에 대한 인식 전환을 이뤄낸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최저임금 1만원의 공약은 그 실현이 미뤄졌지만, 저임금에 기반을 둔 성장은 미래 한국의 나아갈 방향이 아니며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주 52시간제의 과감한 도입은 많은 잡음을 낳았음에도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며 노동자의 휴식은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권리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했다.
경사노위라는 사회적 대화의 큰 틀을 마련한 것도 중요한 국가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동계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한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사회 정책을 통해 과거 만연했던 노동에 대한 편견을 깨뜨렸다"며 "다만, 섬세하게 추진하지 못해 일부 부작용을 낳은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평가했다.
문재인 정부는 남은 임기 동안 누구나 공감하는 노동존중사회 정책의 큰 방향은 유지하되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내실 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임금과 노동시간 등 전통적인 노동 영역을 넘어 4차 산업혁명과 미래 노동시장 변화에 대비하는 데도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술 발전으로 대두한 '플랫폼 노동'으로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이들의 정확한 규모를 포함한 실태 파악도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전통적인 노동 이슈에 매몰돼 노동시장의 이 같은 변화를 놓칠 경우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권 교수는 "노동시장의 토대 자체가 전반적으로 급변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앞으로는 폭넓은 사회안전망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인 노동시장 제도를 구축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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