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이방자 여사 30주기와 한일 신시대
(서울=연합뉴스) 1주일 뒤면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본명이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인 그는 1920년 영친왕 이은(李垠)과 결혼한 뒤 남편 성을 쓰는 일본 풍습에 따라 리마사코가 됐다. 이를 한국식으로 읽은 이름이 이방자다. 일제는 일본 황족과 조선 왕가의 혼인을 통해 내선(內鮮) 융화를 과시하겠다며 이은과 이방자를 강제로 결혼시켰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부인이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여사였으니 대한제국(조선)의 끝과 대한민국의 처음은 다문화가정이 장식한 셈이다.
이은은 1897년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적통인 순종은 후사가 없어 1907년 8월 황제로 즉위할 때 그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20살이나 많은 의친왕 강(堈)을 제치고 황태자가 된 것은 정비 명성황후가 1895년 시해되고 없는 상태에서 생모인 황귀비 엄씨가 내명부 서열이 가장 높은 데다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은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조선이 망해 황제가 되지 못했다. 고종 태황제와 순종 황제는 각각 이태왕(李太王)과 이왕(李王)으로 격하됐고 황태자도 왕세자가 됐다. 그에 앞서 이은은 책봉 넉 달 만에 10살의 나이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귀족학교 가쿠슈인(學習院) 중등과를 거쳐 육사에 입학했다.
이은보다 4살 아래인 이방자는 메이지(明治) 천황의 조카 니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守正)의 맏딸로 태어나 가쿠슈인 초·중등과를 졸업했다. 요시히토(嘉仁) 천황의 맏아들 히로히토(裕仁)의 배우자 물망에 올랐다가 사촌 나가코(良子)에게 밀려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됐다. 일본 어의가 그를 불임 관상이라고 판정하자 조선 왕실의 적통을 끊으려고 이은과 결혼시켰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은과 이방자가 결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1916년 8월 3일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에 실렸다. 육사 생도이던 이은은 휴가지 별장에서 신문 보도를 통해 자신의 약혼 사실을 알았다. 이방자도 자서전에서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전하와 약혼하게 되다니!"라고 술회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는 매일신보도 같은 날 신문에 도쿄발로 보도한 것을 보면 고종과 순종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이방자는 그때부터 머리를 조선식으로 가르마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일본은 둘의 결혼을 위해 일본 황족은 같은 황족이나 그 아래 화족(華族)하고만 결혼할 수 있도록 한 황실 전범까지 개정했다. 결혼식은 1919년 1월 25일 치러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1월 21일 급서하는 바람에 미뤄져 1920년 4월 28일 도쿄에서 거행됐다.
도쿄의 이은 집에는 결혼을 반대하는 편지가 연일 날아들었다. 일본 유학생 서상한은 결혼식장에 터뜨릴 폭탄을 만들었다가 동료의 밀고로 체포됐다. 상하이(上海)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이은을 '구녀(仇女·원수의 여자)를 취한 금수(禽獸)'라고 꾸짖는가 하면 프랑스 파리에서 김규식이 발행하던 잡지 자유대한(La Coree Libre)에도 비판 기사가 실렸다. 이들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1907년 황태자비로 간택됐다가 파혼당한 민갑완의 사연을 크게 실었다가 압수 조치를 당했다.
이방자는 불임상이라는 소문과 달리 결혼 이듬해 아들 진(晉)을 낳았다. 그러나 1922년 4월 조선을 방문했다가 잃는다. 생후 9개월 만에 원인불명으로 갑자기 숨지자 독살설도 흘러나왔다. 이방자는 1923년 한 차례 유산했다가 1931년 12월에야 둘째 아들 구(玖)를 얻었다. 일본에 유학 와 있던 시누이 덕혜옹주(德惠翁主)도 일제의 강압에 따라 그해 5월 쓰시마섬(對馬島)의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결혼했다.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이은은 이왕 작위를 계승하지만 계속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1917년 12월 임관한 뒤 육군대학을 졸업했고 보병 59연대장, 근위보병 제2여단장, 오사카사단장 등을 거쳐 중장으로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까지 지냈다. 이은·이방자 부부는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호화 생활을 누리기는 했으나 일제의 감시와 조선인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이은은 귀국을 서두른 반면 이방자는 한국 정세가 불안하다며 만류했다. 한국인들은 영친왕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귀국을 바라지 않았다. 미국 군정은 황족의 각종 특혜를 폐지해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이방자는 커튼을 뜯어 블라우스를 만들어 입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1947년 일본 국적도 박탈당했다. 1956년에는 미국에 유학 중이던 아들의 MIT대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 여권 발급을 신청했으나 주일 대표부가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일본 국적을 얻어 미국을 다녀왔는데, 이 소식을 듣고 실망한 한국인들은 동정적 시선을 거뒀다.
영친왕 부부는 박정희 대통령이 귀국을 권유하자 1963년 귀국했다. 그러나 영친왕은 1959년 뇌혈전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된 상태였다. 1970년 영친왕이 타계한 뒤 이방자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하며 장애인 봉사에 전념했다. 복지법인 명휘원과 자혜학교를 설립하는가 하면 작품전과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을 보탰다.
이방자는 1989년 4월 30일 88세를 일기로 별세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옆 영원(英圓)에 묻혔다. 낙선재에서 함께 지내던 덕혜옹주가 숨진 지 9일 만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의 연호 쇼와(昭和)가 끝나고 아키히토(明仁) 천황의 헤이세이(平成)가 시작된 해였다. 유일한 혈육 이구는 미국 유학 중 만난 우크라이나 태생의 미국인 줄리아와 결혼했다. 자녀 없이 살다가 영친왕의 도쿄 저택 자리에 지어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2005년 홀로 숨졌다. 이구의 죽음과 함께 조선 왕실의 적통도 끊어졌다.
일본의 요미우리TV는 지난 2월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타계 30주년 특집'을 방송했다. 3월 10일에는 재일동포 성악가 전월선이 이방자 역을 맡은 오페라 '더 라스트 퀸'(The Last Queen)이 오사카에서 선보였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10월 서울 종로구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이방자 여사의 서화·도자기·칠보 유작전이 열린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추모 행사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이방자 여사의 30주기인 30일에는 헤이세이 시대가 끝나고 이튿날 나루히토(德仁) 천황의 레이와(令和) 시대가 열린다.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비운의 일본 황녀 이방자 여사가 남긴 발자취를 생각하면서 새로운 한일 관계를 모색해야 할 때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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