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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등재 4년' 군함도 역사미화 여전…강제징용은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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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등재 4년' 군함도 역사미화 여전…강제징용은 '실종'
환경재단 '피스&그린보트' 한일 시민 태우고 현장답사
조선인 강제노역 설명 전혀 없이 일방적 '근대화 찬미'
日시민들이 세운 '오카 마사하루 기념관', 당시 참혹한 실상 전해 대조


(나가사키=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하시마(군함도) 탄광에는 전국 각지에서 많은 분이 일을 찾아 왔습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나라와 출신지와 관계없이 목숨을 걸고 동료로서 좋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14일 환경재단 '피스&그린보트' 기항지 프로그램의 하나로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군함도 디지털 박물관'에 들른 한일 시민들이 들은 한국어 설명이다.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사진들이 영상으로 흐르는 동안 여성 목소리의 기계음은 군함도와 그곳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삶을 설명했다. 그 안에 조선인의 강제노역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섬 전체가 하나의 가족과도 같았습니다. 40년 이상 무인도였지만, 2015년 세계유산에 등록되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박물관 견학을 마치고 운이 좋게 군함도에 들어갔을 때도 조선인 강제노역의 고통스러운 역사는 들을 수 없었다.
군함도는 남북으로 약 480m, 동서로 약 160m, 둘레 약 1천200m의 작은 해저 탄광섬으로, 나가사키반도에서 약 4㎞ 떨어진 곳에 있다.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아파트가 늘어선 외관이 군함과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라고 불린다. 군함도는 1960년대에는 5천명가량 주민을 수용해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 밀도를 기록했다. 이는 당시 도쿄 인구 밀도의 9배 이상이었다.
군함도는 나가사키항 마츠가에 국제터미널에서 페리로 약 40분을 타고 들어가면 나온다. 군함도에 접안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직접 가봐야 안다. 다행스럽게도 이날은 파도가 높지 않아 정박할 수 있었다.


군함도로 향하는 페리에서도 그곳에서의 생활상만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한국인들을 위한 공식적인 통역은 허용되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흡연 금지' 같은 도식뿐이었다.
페리 내부에서 상영한 군함도 관련 영상은 옥상에서 야구 경기를 하는 아이들, 활기찬 표정으로 줄다리기가 펼쳐진 운동회, 아이들이 바다 수영을 하는 모습 등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만을 담았다.
영상 속 영문 자막은 "군함도 사람들은 부유했고, 값비싼 가전제품을 사용했다. 군함도는 병원과 각급 학교, 쇼핑·오락 시설이 포함된 자급자족의 도시였다. 섬의 운동회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탄광 직원과 노동조합원들도 참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군함도에서의 세계유산은 제1수직갱과 방파제뿐이지만, 그 안의 아파트만을 설명했을 뿐이다.
군함도에 대한 역사 미화는 약 30분간 이어진 현장 견학에서도 이어졌다.
이곳 가이드를 맡은 노신사 역시 연신 군함도에서의 생활상만을 설명했다. 군함도에서 배출된 분뇨 근처에 모여있던 물고기를 본토 사람들이 낚시해 가서 회로 먹었다는 등 중간중간 우스운 이야깃거리를 넣어 방문객들을 웃음 짓게 했다.
이영채 케센여학원대학 국제사회학과 교수는 "이곳 해설사는 1956년부터 1974년 폐광 전까지 군함도에서의 아파트에서의 모습 같은 생활상만 얘기할 뿐 이전의 역사는 말하지 않는다"며 "전체적으로 설명 방식에 문제가 많다. 이곳에서의 설명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역사를 말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노신사의 입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인 강제 노동에 대한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분명히 조선인이 있었다. 강제로 끌려와 찜통 같은 지하 갱도에서 엎드리거나 누운 채 목숨을 걸고 탄을 캐야 했다.
동원된 조선인들 사이에서 하시마는 '죽어야 벗어날 수 있는 지옥섬'으로 불렸다. 이들은 해저 600∼700m에 있는 탄광에서 가혹한 노동과 학대에 시달려야 했다.


1939∼1945년 하시마에는 1천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장(火葬) 관련 문서로 확인된 사망자는 50명 정도다.
한성민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하시마 안 노동자 숙소에서는 신분 구조를 그대로 볼 수 있다"며 "조선인과 중국인은 가장 아래층에 살았고, 탄광 사무소장과 일본인들은 그 위에 살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파도가 섬의 방파제를 넘어오기 때문에 항상 이들의 숙소는 습했다"며 "채광도 잘되지 않아 방이 젖은 상태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는 이처럼 한국인 등에 대한 강제 노역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군함도 등 일본 산업시설에서 이뤄진 강제노역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릴 것을 일본에 촉구했으나 이날 확인한 현지 모습은 여전히 '근대화 역사 찬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군함도를 포함한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제대로 반성하자는 목소리가 이어져 오고 있다.
전날 한일 시민이 함께 방문한 '오카 마사하루 기념관'에서는 군함도 피해자 서정우 씨 이야기를 중심으로 당시 군함도에 살았던 조선인의 참혹한 삶을 재구성하고 있다. 오카 마사하루 기념관은 일본의 가해 역사를 사실에 근거해 호소하고자 시민들이 건립한 박물관이다.
이곳에서는 콩깻묵 80%, 현미 20%로 된 밥과 덩어리째 삶아 부순 정어리로 끼니를 이어가며 중노동에 시달린 군함도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삶을 볼 수 있다.
이 기념관의 사키야마 노보루 사무국장은 "패전 당시 이곳에 조선인 500∼800명이 건물 1층과 지하의 매우 열악한 곳에서 생활했다"며 "과거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와 기업이 피해국과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soh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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