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많이 무서웠지"…반려견도 함께 지내는 이재민 대피소
전국 온정 나흘째 이어져…빨래·급식·사우나에 침술 봉사까지
(고성=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강원 동해안 산불로 피해 주민들이 나흘째 대피소 생활을 이어가는 8일 고성군 천진초등학교 내 임시거주시설에서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려왔다.
소리의 주인공은 이재민 한모(65)씨의 반려견 길순이. 낯선 환경이 스트레스로 다가왔는지 한씨가 "괜찮아"라며 달래도 쉽게 진정하지 않았다.
지난 4일 휴대전화로 대피 안내문자를 받은 한씨는 남편과 함께 산불 현장을 확인하고 황급히 집으로 향했다.
불길은 그의 달음질만큼 빨라 금세 집을 덮칠 기세였다. 가족 같은 길순이 말고는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채 대피했다.
한씨는 5년 전 마을에서 길을 떠도는 유기견을 만나 길순이로 이름 짓고 여태껏 함께 살고 있다.
길순이는 자칫 우울감에 빠지기 쉬운 이재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씨의 등에 손녀처럼 항상 업혀 다니는 길순이를 본 이주민들은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고, 아이들도 주위에 몰려 반갑게 손을 흔든다.
한씨는 "행여나 다시 버려진다 생각할까 봐 불길이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길순이를 챙겼다"며 "이재민 몇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해해준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길순이 옆을 지키던 다른 이재민은 "이번 산불로 많은 개가 목숨을 잃은 것을 뉴스에서 보고 마음이 아팠다"며 "이렇게 사랑받는 길순이는 복 많은 강아지"고 말했다.
고단한 대피소 생활이 나흘째 이어지자 이재민들은 두고 온 집과 논밭이 걱정이다.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인흥리 주민들은 "지금쯤이면 볍씨와 고추씨를 파종해야 한다"며 "몇몇 이웃은 대피소에서 잠을 자고 낮이면 밭으로 나간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이 왔을 때 농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며 "이 약속만 굳게 믿고 있다"고 덧붙였다.
산불 이재민들의 고통에 공감해 전국에서 많은 온정이 대피소로 이어지고 있다.
52개 텐트 안에 이재민 126명이 모여 자칫 여러 불편함이 생기기 쉬운데, 자원봉사자들이 이들을 세심하게 챙기고 있다.
여러 기업, 종교·사회 단체에서 생필품과 식사, 통신기기, 빨래 등을 지원하며, 인근 대형 리조트와 스파에서는 셔틀까지 동원해 무료 사우나를 제공한다.
강원도 한의사협회는 의료봉사단을 보내 몸이 불편한 이재민들을 침술로 보살피고 있다.
행정안전부 소속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 상담사들도 마음을 다친 이주민들을 돕고 있다.
한 센터 관계자는 "이재민 중 상당수가 눈을 감아도 불타는 집이 떠오른다며 두통, 불면을 호소한다"며 "재난 현장에서 자신의 집이 불탄 것을 본 사실 자체가 가장 큰 스트레스로 자칫 우울감과 무기력에 빠지기 쉽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초기 상담 중 심리적 병리 증상을 크게 보이는 이재민을 강원도정신건강복지센터로 연결해 정확한 치료를 받게 하고 있다.
한편 속초, 고성, 동해, 강릉 등 산불 발생 지역 시군 이재민 수는 이날까지 513가구 916명으로 집계됐다.
각 시군 피해신고 접수처에는 재난 피해신고가 쇄도하고 있다.
yangd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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