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살해 연루 여성들 모두 살인혐의 벗어…진상은 미궁으로
'사건배후 연결고리' 북한인 용의자들은 범행 직후 北으로 도주
말레이 법원, 동남아 여성들 이용당했을 가능성 크다고 본 듯
(하노이·자카르타=연합뉴스) 민영규 황철환 특파원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을 살해한 혐의를 받던 베트남 여성이 1일 살인 혐의 대신 상해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아 다음 달 초 석방된다.
앞서 인도네시아 국적 여성이 지난달 공소 취소로 전격 석방됐기 때문에 이제 김정남 암살사건과 관련해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됐다.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 터미널에서 김정남이 화학무기인 VX 신경작용제 공격을 받고 숨졌을 당시 현지 경찰은 최소 8명의 북한인이 사건에 연루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중 경찰에 체포된 인물은 약학과 화학 전문가로 알려진 리정철(48)뿐이다.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7·여)와 베트남인 도안 티 흐엉(31·여)에게 VX를 주고 김정남의 얼굴에 바르도록 한 것으로 알려진 리재남(59), 리지현(35), 홍송학(36), 오종길(57) 등 북한인 용의자 4명은 범행 직후 출국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캄보디아 프놈펜,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경유해 같은 달 17일 전후 평양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주범 격 인물들을 놓친 말레이시아 경찰은 리정철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열쇠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
도주한 북한인 용의자 4명에게 차량을 제공하는 등 정황이 파악됐을 뿐 그가 김정남 암살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힐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말레이 당국은 현지 건강식품업체에 위장 취업한 고정간첩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리정철을 국외로 추방하는 데 그쳤다.
북한인 용의자 4명이 출국 전 만났던 것으로 추정되는 현지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46)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39)은 체포를 피하려고 치외법권인 대사관 내에 숨는 바람에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리얼리티 TV용 몰래카메라 영상을 찍는다면서 쿠알라룸푸르 현지에서 시티를 섭외하고 예행연습을 시킨 북한인 리지우(일명 제임스·32)도 함께 대사관에 은신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김정남의 시신을 인도하고 암살에 연루된 자국민들을 출국시키라는 요구가 거부되자 북한에 거주하던 말레이시아 외교관과 민간인을 전원 억류하는 '인질외교'를 벌였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에 굴복해 같은 해 3월 30일 김정남의 시신을 넘기고 형식적인 조사만 한 뒤 현광성과 김욱일을 출국시켰다.
리지우의 경우 출국 기록이 없지만 이후 모종의 경로를 통해 북한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말레이시아 검경은 북한인 용의자들이 버려두고 간 흐엉과 시티를 붙잡아 재판에 넘기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들은 범행 당시 입은 옷 등 증거조차 인멸하지 않은 채 현지에 남았다가 범행 2∼3일 만인 2017년 2월 15일과 16일 잇따라 체포됐다.
이런 정황 때문에 관련국에선 말레이시아 정부가 억류된 자국민을 귀환시키려고 북한 정권과 타협하면서 '깃털'에 불과한 여성 피고인들만 희생양이 됐다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말레이시아 검찰은 김정남의 얼굴에 VX를 바를 당시 두 여성이 보인 모습이 '무고한 희생양'이란 본인들의 주장과 거리가 있다면서 이들이 '훈련된 암살자'라고 반박했지만, 지난달 11일 시티의 공소를 취소하고 전격 석방했다.
이어 1일에는 흐엉의 살인혐의를 철회하고 상해 혐의로 공소장을 변경했고, 법원은 혐의를 인정한 그에게 징역 3년 4개월을 선고했다. 이에 따라 흐엉도 오는 5월 첫째 주 석방될 예정이다.
말레이시아 검찰은 사건 발생 2년여 만에 갑자기 동남아 여성들의 공소를 각각 취소하고 변경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범 격인 북한인 용의자들을 모두 놓친 상황에서 이들에게 이용당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동남아 여성들에게 살인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가는 외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또 동남아 여성만 처벌했을 때 얻는 실익도 없다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자국민의 조기 석방을 위한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정부의 치열한 물밑 외교전도 말레이시아 정부로서는 외면하기 어려웠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결과적으로 다음 달 초에는 김정남 암살에 연루됐던 인물들은 전원 자유의 몸이 된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정남 암살사건을 지시한 배후의 실체는 영원히 미궁으로 남게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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