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문서] 사마란치의 88올림픽 분리개최안은 소련참가 명분쌓기
'일부종목 北서 분산개최' 중재안…"소련 등 사회주의국가 참여할 구실 필요"
北, 4차례 남북체육회담에서 공동개최 고집하다 관철안되자 끝내 불참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북한의 참여를 위해 남북체육회담을 주재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처음부터 북한이 일부 종목을 서울과 평양에서 분리 개최하는 방안을 거절할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이를 중재안으로 제시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재안은 서울올림픽 참가에 대한 북한의 반발을 의식해야 하는 소련 등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참가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기 위한 '카드'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31일 외교부가 공개한 16권 분량의 '1988년도 서울올림픽대회-남·북한 단일팀 구성 및 공동개최 문제' 외교문서에는 88올림픽을 앞두고 사마란치 위원장 주재로 스위스 로잔에서 4차례 열린 남북체육회담이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기까지의 비화(秘話)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소련 등 공산권 국가의 대거 불참으로 '올림픽 정신'이 바랬던 1984년 LA올림픽의 아쉬움을 씻어내기 위해 남북한을 빈번하게 접촉하며 적극적으로 소통해왔다. 북한이 88올림픽을 남북 공동으로 개최하지 않으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불참을 유도할 것이라고 밝혀왔다는 점도 사마란치 위원장의 등을 떠밀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4년 9월 19∼23일 모스크바 방문을 마치고 같은 달 27일 한국을 찾은 사마란치 위원장은 이튿날 이름을 밝히지 않은 '위원장'(노태우 당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추정)과의 대담에서 88올림픽 일부 종목을 북한에서 분리 개최하는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며 운을 띄웠다.
올림픽 일부 종목을 남북이 나눠서 개최하는 안(案)은 1984년 LA올림픽이 열리기 전 줄리오 안드레오티 이탈리아 외무장관이 처음 제안한 아이디어로, 소련은 여기에 찬성하고 있으며 북한 역시 이러한 아이디어의 존재를 알고 있으나 "상부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을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밝힌 상황이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익명의 '위원장'에게 "어떻게 북한이 세계 각국의 선수, 임원, 언론인들에게 국경을 개방할 수 있단 말이냐"며 "이 제안이 비현실적이고 실현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결코 이 제안을 수락하지 못할 것"이라며 "한국은 '안된다'고 하지 말고 'IOC가 공식적으로 제안해올 때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해볼 용의가 있다' 정도로만 답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사마란치 위원장이 이 같은 '공작'에 나선 것은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참가 유도를 위함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 무렵 사마란치 위원장이 소련을 방문하는 동안 소련이 1984년 LA올림픽 불참을 후회하고 있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에 참여하고 싶어한다는 의중을 읽어낸 것이 단초였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LA대회 보이콧 이후 서울대회에 오고 싶어하고, 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단 한 가지 장애물이 북한"이라며 "그래서 한 가지 핑계를 찾고 있는데 만약 북한이 2∼3개 종목 개최를 수락하지 않으면 서울에 갈 구실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위원장'이 "북한이 경기를 반반 나누어 개최하자고 한다든가, 육상 같은 주요 경기를 주면 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다"고 밝히자, 사마란치 위원장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며 "양궁 같은 작은 경기가 그것(분산개최 종목)이고 모든 주요 경기와 개·폐막식은 서울에서 열릴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우리(한국)는 북한의 참가를 바라는데 이에 대한 묘안은 없느냐"는 '위원장'의 질문에 "지금으로서는 없다. 기다릴 뿐이다"라며 "제일 중요한 문제는 사회주의 국가가 이곳(서울)에 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북한도 오는 것이 훨씬 쉬워질 수 있다"다 답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위원장'과의 면담에 앞서 1984년 9월 26일 제네바 국제공항 귀빈실에서 면담한 주제네바 한국대사에게 "소련 스포츠 당국자들이 LA올림픽 불참을 실수(mistake)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고 귀띔했다.
같은 날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면담한 주불 한국대사에게 "소련은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고 싶은 게 본심"이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적당한 명분과 구실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분리개최안을 거부한다면 소련으로서는 "모든 가능한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북한이 거절했으므로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겠다고 북한에 통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남북체육회담은 스위스 로잔에서 1985년 10월 8∼9일 처음 열렸고 1986년 1월 8∼9일, 1986년 6월 10∼11일, 1987년 7월 14∼15일까지 총 네 번의 만남이 있었으나 남북은 끝내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북한은 시종일관 88올림픽 공동개최를 주장했고, 한국은 일부 구기 종목 예선전 개최와 사이클 경기코스에 북한 지역을 일부 포함하는 안으로 맞섰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IOC 헌장에 따라 남북 올림픽 공동개최는 불가하다며 일부 종목을 한국과 북한에서 분산해 개최할 수 있다는 중재안을 내놨다. 수정을 거쳐 IOC 중재안은 탁구, 양궁, 여자배구, 사이클 남자 개인 도로경기, 축구 예선 1개 조를 북한에 배정하는 것으로 최종 정리됐지만, 북한이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사마란치 위원장의 예측대로 북한은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은 160개 국가가 참가함으로써 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됐다. 북한을 비롯해 알바니아·니카라과·쿠바·에티오피아·세이셸 등이 서울올림픽에 불참했다.
한편, 제1차 남북체육회담이 열리기 전 의제를 논의하기 위해 사마란치 위원장이 1985년 8월 25∼28일 방한했을 때 한국 정부는 그에게 양궁에 걸린 금메달 수를 늘려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1985년 8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가 작성한 'IOC 위원장 방한 결과 보고'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88올림픽 양궁 종목 금메달 수를 기존 2개에서 4개 내지 12개로 늘려달라고 요청했고, 사마란치 위원장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국제연맹을 통해 IOC에 건의토록 했다.
실제로 1984년 LA올림픽 때만 해도 양궁 종목은 남·여 개인전 2개뿐이었으나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남·여 단체전이 추가돼 총 4개로 늘었다. 양궁 올림픽 종목이 2개에서 4개로 늘어난 과정에 대해서는 외교문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사마란치 위원장의 방한을 계기로 이와 관련된 논의에 본격적인 불이 붙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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