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서방 우려 불구 中과 '일대일로' 양해각서…G7 최초(종합4보)
에너지 29개 부문서 협력키로…"25조원 규모 잠재적 경제 효과"
중국, 동유럽 잇는 트리에스테항·북서부 제노바항 투자 길 열려
연정 내부에서도 반발 기류…살비니 부총리 "중국, 자유시장 아냐"
서방 "이탈리아, 중국의 '트로이 목마' 될 가능성" 우려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이탈리아가 중국의 확장 정책에 대한 서방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 참여를 공식화했다.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는 23일(현지시간) 로마에서 이탈리아를 국빈 방문 중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일대일로 양해각서(MOU) 서명식을 개최했다.
양국이 체결한 양해각서는 구속력을 가진 국제조약이 아니지만, 이탈리아가 주요 7개국(G7) 가운데 일대일로에 동참하는 최초의 국가가 됐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전 세계적인 이목이 쏠렸다.
중국은 미국과 무역 전쟁을 벌이고, 유럽연합(EU)으로부터는 중국 기업의 불공정 경쟁 등에 대한 견제가 강화되는 와중에 서방의 핵심 일원이자 경제 규모에서 세계 10위의 강국인 이탈리아를 끌어들임으로써, 일대일로의 위상을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의 가세는 그동안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에서는 동유럽과 그리스, 포르투갈 등 비주류 국가에 국한되던 일대일로가 유럽 선진국까지 확대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날 MOU 체결식에서는 중국과의 관계 강화에 앞장서 온 루이지 디 마이오 부총리 겸 노동산업장관, 중국 쪽에서는 허리펑(何立峰)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 등이 서명자로 나섰다.
양국의 핵심 관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로마 도심 외곽에 위치한 호화로운 르네상스 시대의 저택 '빌라 마다마'에서 열린 서명식이 끝나자 양측에서는 우렁찬 박수가 길게 이어졌고, 콘테 총리와 시 주석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오랜 악수를 했다.
콘테 총리는 "양국은 (일대일로 MOU 체결을 계기로) 더 효율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양국이 체결한 일대일로 양해각서에는 에너지, 항만, 관광, 은행, 농업 등 산업 분야뿐 아니라 문화재, 교육, 항공우주 등 민간과 정부를 망라한 총 29개 분야에서 상호 협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특히, 이탈리아 회사들이 500여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방문한 시진핑 주석으로부터 짭짤한 선물을 챙긴 것으로 여겨진다.
토목회사 다니엘리는 중국이 추진하는 11억 유로(약 1조4천억원) 규모의 아제르바이잔 철강발전소 건설에 참여할 수 있게 됐고, 에너지업체 안살도(Ansaldo)는 중국회사에 2천500만 유로(약 320억원) 규모의 가스발전 설비를 납품하기로 하는 등 이날 체결된 MOU의 경제 가치는 총 25억 유로(약 3조2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디 마이오 부총리는 서명식 후 기자회견에서 "'메이드 인 이탈리아'로 통칭되는 이탈리아 상품과 이탈리아 회사, 이탈리아 전체가 승리한 날"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오늘 서명한 계약의 미래의 잠재적인 가치는 200억 유로(약 25조원)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이날 합의로 이탈리아의 오렌지와 소고기 등 농축산물의 중국 수출도 가시화됐다.
중국 측도 동유럽을 잇는 요충지인 이탈리아 북동부 트리에스테항과 북서부 제노바항의 투자와 개발 등 눈독을 들여온 사업에 참여할 길이 열리고, 문화재 796점을 이탈리아에서 돌려받기로 하는 등 실질적인 성과를 얻었다.
미국이 유럽에 중국 네트워크 장비업체 화웨이 사용을 배제하라는 압박을 가하는 가운데 이뤄진 이날 서명식에서는 사안의 민감성을 반영해 통신 분야에서 협력한다는 내용은 빠졌다.
그러나, 이날 서명식에는 현재 이탈리아 정치인 중에서 가장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탈리아 포퓰리즘 연립정부의 실세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 겸 내무장관이 불참해 일대일로를 둘러싼 이탈리아 정부 내부의 분열상을 드러냈다.
극우 성향의 정당 '동맹'을 이끌며 강경 난민 정책에 앞장서고 있는 그는 전날 대통령궁에서 시 주석을 위해 베푼 국빈 만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살비니 부총리는 이날은 북부 체르놉비오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중국이 '자유 시장'을 갖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중국을 비판해 이날 MOU 체결에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부르짖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처럼 '이탈리아 퍼스트'를 외치는 그는 일대일로 참여는 중국 기업의 이탈리아 식민화로 이어질 수 있으며, 통신 등 민감한 분야에서의 협력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견해를 앞서 밝힌 바 있다.
'현대판 실크로드'로 불리는 일대일로는 중국 주도로 아시아, 유럽 등 전 세계의 무역·교통망을 연결해 경제 벨트를 구축하려는 구상으로, 시진핑 주석의 대표적인 외교 정책으로 꼽힌다.
2013년 창시돼 현재까지 총 1조 달러(약 1천100조원)의 돈이 투입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국가와 국제적 기관만 해도 약 150개에 달한다는 게 중국의 설명이다.
하지만, 중국이 경제와 무역을 겨냥한 구상이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은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지정학적, 군사적인 확장을 꾀하려 하고 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개럿 마퀴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이 최근 이탈리아의 일대일로 참여는 "중국의 '헛된'(vanity) 인프라 프로젝트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경고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서방은 또한 일대일로 참여로 이탈리아의 전략 산업과 기술, 민감한 정보가 중국에 넘어갈 위험성에도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아울러, 슬로베니아와의 접경에 위치한 트리에스테항 등 유럽 심장부로 향하는 교두보가 될 항구들을 중국에 내줌으로써 이탈리아가 서방으로 세력을 넓히려는 중국의 '트로이 목마'가 될 수 있다고도 우려한다.
동맹국의 이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장기적인 경제 침체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는 중국과의 무역을 활성화하고, 중국으로부터의 투자를 촉진함으로써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일대일로 참여를 결정했다.
한편, 올해 첫 해외 순방지인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일대일로 MOU 서명이라는 큰 전리품을 챙긴 시진핑 주석은 이탈리아 공식 방문을 마무리 짓고, 개인적인 일정을 보내기 위해 오후 비행기로 남부 시칠리아섬으로 이동했다.
시 주석은 시칠리아 주도 팔레르모에서 1천년 역사를 지닌 노르만 궁전 등을 둘러보는 등 개인적인 시간을 보낸 뒤 24일 시칠리아를 떠나 두 번째 순방 국가인 모나코로 향했다.
현지 언론은 시 주석 일행이 시칠리아에서 잡은 호텔 방만 해도 80개에 달하는 등 그의 방문으로 시칠리아가 들썩였다고 전했다.
앞서, 시 주석은 22일에는 세르지오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과 만나 내년에 수교 50주년을 맞는 양국의 전략적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일대일로를 매개로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의 교류를 확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양국 정상은 이 자리에서 이탈리아의 일대일로 참여에 대한 미국과 EU 등 서방의 우려를 의식한 듯 "투자와 교역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타렐라 대통령은 또한 '일대일로'는 교역뿐 아니라 인권에 관한 대화도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중국의 인권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거론했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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