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애써 키운 배추, 제 손으로 '갈기갈기'…농민들 '한탄'
가격 추가하락 막으려 겨울배추 주산지 해남서 1만여t 산지폐기
(해남=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배추 키우는 농민들이 더는 설 자리가 없어요"
올해로 4번째 산지폐기에 들어간 전남 해남군 해남읍 한 배추 농가 현장.
7일 이른 아침부터 일용직으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배추를 폐기하려면 배추 한 포기, 한 포기마다 묶여 있는 끈을 먼저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상품 배추를 생산하기 위해 농민들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묶어놨던 끈이다.
이렇게 정성스레 키운 배추를 산산조각내야 하는 농민 허영조(52) 씨는 굳은 표정으로 트랙터에 올라탔다.
농사를 더 잘 지어보겠다며 사들인 트랙터로 멀쩡한 배추를 직접 폐기해야 하는 허 씨는 작업하는 동안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땅속에서 봉긋하게 올라온 배추는 트랙터의 대형 바퀴와 칼날에 짓뭉개지거나 갈기갈기 찢겼지만 속살은 여전히 싱그러움을 간직할 정도로 질이 좋았다.
허 씨는 "값 오르기를 기대하고 배추를 놔두면 봄 작물이 밭에 들어갈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폐기하는 것"이라며 "어느 정도 보상은 나오지만 그래도 적자인 것은 매한가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저온저장고에 맡기는 방법도 있지만, 가격이 오르지 않으면 창고이용료로 적자만 더 커질 수 있어 선택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배추 가격은 2014년 겨울 배추 파동 이후 안정세를 보였으나 지난해 가을배추 풍년으로 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잔여량이 많이 남은 가을배추와 겨울배추 출하 시기가 겹치면서 가격 추가 하락이 우려돼 산지폐기가 추진됐다.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이 정부의 농경 정책 실패 때문이라고 허 씨는 분통을 터트렸다.
허 씨는 "한때 정부와 사회 분위기가 귀농을 추천했지만 이렇게 산지폐기를 하는데 과연 잘 사는 농민이 있겠느냐"며 "살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허 씨와 같은 상황에 내몰린 농가가 배추 주산지인 전남 해남군에 속출하고 있다.
오는 15일까지 비계약 농업인의 포전과 유통상인 계약물량을 주 대상으로 해남군에서만 111ha, 1만여t을 폐기하기로 했다.
농협 관계자는 "선제적으로 산지폐기를 하지 않으면 배추 가격이 더 떨어질 수 있다"며 "최대한 보상과 농가 피해 최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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