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이 황현 위해 쓴 추모시, 서대문형무소서 첫 공개(종합)
문화재청, 3·1운동 특별전 '문화재에 깃든 100년전 그날'
감시대상 인물카드·이육사 원고·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 등 전시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의리로써 조용히 나라의 은혜를 영원히 갚으시니/ 한 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네/ 이승의 끝나지 않은 한 저승에는 남기지 마소서/ 괴로웠던 충성 크게 위로하는 사람 절로 있으리"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은 1915년 2월 8일(음력 1914년 12월 25일) 국권이 일제에 넘어간 직후 큰 슬픔에 잠겨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매천 황현(1855∼1910)을 추모하는 시를 써서 황현 유족에게 보냈다.
'매천선생'(梅泉先生)이란 추모시는 전남 순천에 거주하는 황현 후손이 100년 가까이 간직해 온 자료인 '사해형제'(四海兄弟)에 실렸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한용운의 친필 황현 추모시가 일제강점기 독립과 자주를 갈망한 수많은 애국지사가 갇혔던 서대문형무소에서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문화재청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제10·12옥사에서 1910년 경술국치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까지 약 40년 동안의 역사적 상황을 재조명하는 뜻깊은 특별전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을 19일부터 연다.
1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정인양 문화재청 사무관은 "'매천선생' 시는 복제본이 전시에 나왔지만, 친필 원고 이미지가 공개되기는 최초"라며 "그간 잘못 전해진 자구를 수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홍영기 순천대 명예교수는 "한용운은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간행한 뒤 전국을 다니며 순회강연을 했다"며 "만해가 구례 화엄사에 갔을 때 절 아래에 있는 매천 집에서 황현의 동생을 만나 시를 준 것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했다.
오는 4월 21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문화재청이 추진한 항일독립문화재 발굴과 등록 성과를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하다. 전시 공간은 도입부를 시작으로 3부로 나뉘며, 곳곳에 최근 문화재로 등록된 유물을 배치했다.
도입부는 매천 황현의 유물이 눈길을 끈다. 비통함과 분노를 담아 작성한 매천의 '절명시' 복제본과 그가 사용한 안경과 벼루 진품을 비롯해 '사해형제'와 신문 자료를 모은 '수택존언'(手澤存焉) 복제본이 공개된다.
'수택존언'은 '손때가 묻은 옛사람의 흔적'이라는 뜻으로, 안중근 공판 기록과 그가 하얼빈 의거 전에 집필한 시로 구성됐다. 이 자료는 매천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저서인 '매천야록'(梅泉野錄) 중 안중근 부분을 집필할 때 기초가 됐다.
1부 '3·1운동, 독립의 꽃을 피우다'로 넘어가면 등록문화재 제730호인 '일제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가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을 자아낸다.
일제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는 일제가 주요 감시대상 4천857명 신상을 카드 형태로 정리한 기록물로, 안창호·윤봉길·유관순·김마리아 등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전시에서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북한 지역 3·1운동 수감자와 여성 수감자의 활동 상황을 소개한다.
아울러 저항시인 이육사 친필 원고 중 현존하는 두 자료로 알려진 등록문화재 제713호 '편복'과 등록문화재 제738호 '바다의 마음'도 관람객과 만난다.
이정수 문화재청 학예연구사는 "안동 이육사문학관에 있는 편복 원고와 이육사 형의 후손이 소장한 바다의 마음 원고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난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2부 '대한민국임시정부, 민족의 희망이 되다'에서는 임시정부 관련 유물을 볼 수 있다.
조소앙이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독립운동과 건국 방향을 정리한 등록문화재 제740호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과 등록문화재로 예고된 이봉창 의거 관련 유물이 나온다.
마지막 3부 주제는 '광복, 환국'. 백범이 세상을 떠난 해인 1949년에 쓴 유묵 '신기독'(愼其獨)과 1945년 11월 초판이 발행된 등록문화재 제576호 '한중영문중국판 한국애국가 악보'가 공개된다.
문화재청은 전시와 연계해 2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항일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활용'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고, 다음 달에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3·1운동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고종의 국장과 관련된 자료를 선보이는 전시를 개최한다.
다만 전시에 나온 문화재 중 대부분은 복제본이라는 점이 아쉽다. 문화재청은 유물 보존환경을 고려해 복제본 전시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육사 원고와 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 같은 원본도 오는 19일, 3월 1일, 4월 11일에만 전시된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가보면 아픈 추위가 온몸에 박히면서도 울컥하는 기분이 든다"며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료의 발굴과 보존에 더욱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정 청장은 이어 "올해는 광복 74주년이 되는 해로, 3·1절이 더욱 특별하다"며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심훈이 지은 시 '그날이 오면'을 낭독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중략)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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