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속 3·1 운동] ⑫ '식민굴레' 동남아 언론의 동병상련…"계층넘어 韓人 단결"
싱가포르 스트레이츠타임스 등 한국 3·1운동 이례적 상세 보도
"독립 외치다 수만명 연행…日경찰, 모진 폭행에 담뱃불 고문 자행"
"서구열강들, 왜 한국독립 논의 않나" 투고란에 독자 서신 싣기도
'일본 동맹' 영국의 식민지 인도는 소극적 보도…통신기사 단신 소개
※ 편집자주 = "조선 독립 만세".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반도 전역을 울렸던 이 함성은 '세계'를 향한 우리 민족의 하나 된 외침이었습니다. 한민족이 앞장서 '행동'함으로써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의 각 민족을 자각시켜 함께 전 세계적 독립운동을 끌어가자는 외교적 호소였습니다. 강대국의 이권 다툼이 판치던 당시 국제질서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을 얻었던 일본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외신 보도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3.1운동 초기 보도통제와 '프레임 조작'으로 관련 보도를 막는 데 그야말로 전력투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문제이지, 진실을 감출 순 없었습니다.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중국 상하이(上海)로부터 시작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 D.C.에 이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러시아 모스크바, 브라질 상파울루, 싱가포르로 3·1운동 소식은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길지 않은 기사도 많았지만 이에 자극받은 각 식민지 국가에서는 앞다퉈 독립선언문이 나오면서 민족적 독립운동이 촉발됐습니다. 비록 한민족이 '자립'(自立)에는 실패했지만, 외신의 창(窓)을 통해 민족 자결과 독립에 대한 세계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 포진한 특파원망을 총동원해 당시 외신 보도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보도합니다. 지금까지 3·1운동을 보도한 외신 일부가 부분적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세계 주요국 별로 보도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관련기사>
[외신속 3·1 운동] ① 그 날 그 함성…통제·조작의 '프레임' 뚫고 세계로[http://www.yna.co.kr/view/AKR20190207090000009?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② 日언론엔 '폭동'뿐…총독부 발표 '앵무새' 전달 [http://www.yna.co.kr/view/AKR20190213157000073?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③ 상하이서 첫 '타전'…은폐 급급하던 日, 허 찔렸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14084600097?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④ 韓人 여학생이 띄운 편지, '대륙의 심금'을 울리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08154700089?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⑤ 샌프란發 대서특필…美서 대일여론전 '포문' 열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14006800075?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⑥ 美 타임스스퀘어에 울려퍼진 독립선언…세계가 눈뜨다[http://www.yna.co.kr/view/AKR20190215013400072?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⑦ WP "선언문 든 소녀의 손 잘라내"…日편들던 워싱턴 '충격' [http://www.yna.co.kr/view/AKR20190216018300071?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⑧ 러 프라우다·이즈베스티야도 주목…"조선여성 영웅적 항쟁"[http://www.yna.co.kr/view/AKR20190217045600080?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⑨ '영일동맹' 허울에 英언론 日 '받아쓰기' 그쳐 [http://www.yna.co.kr/view/AKR20190212161500085?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⑩일제 치하서 울려퍼진 佛혁명가 '라 마르세예즈' [http://www.yna.co.kr/view/AKR20190218002100081?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⑪ 獨·伊언론 '짤막' 보도…'내코가 석자'·日 눈치
[http://www.yna.co.kr/view/AKR20190215008100082?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⑪ 獨·伊언론 '짤막' 보도…'내코가 석자'·日 눈치
[http://www.yna.co.kr/view/AKR20190215008100082?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⑪ 獨·伊언론 '짤막' 보도…'내코가 석자'·日 눈치
[http://www.yna.co.kr/view/AKR20190215008100082?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⑪ 獨·伊언론 '짤막' 보도…'내코가 석자'·日 눈치
[http://www.yna.co.kr/view/AKR20190215008100082?input=1195m]
(방콕·자카르타·뉴델리=연합뉴스) 김남권 황철환 김영현 특파원 = 일제의 지배를 거부한 전 민족적 항거였던 3·1 운동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끈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동남아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벌여 주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해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영국의 식민지로 비교적 일찍부터 신문산업이 성장했던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언론 매체들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선 같은 해 3월 하순부터 3·1 운동과 관련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보도는 로이터 통신 등 식민지 본국 언론사가 작성한 기사를 1주일 간격을 두고 받아쓰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싱가포르 유력 일간지 '스트레이츠타임스'는 '한국의 소요사태, 독립 소문에 흥분한 사람들'(Trouble in Korea. People Excited By Rumoured Independence) 제하의 기사를 통해 "수천 명의 한국인이 3월 1일 서울 거리를 행진했고, 프랑스와 미국 영사관 밖에서 환호성을 울렸다"고 전했다.
1835년부터 1962년까지 발간됐던 신문인 '싱가포르 프리 프레스'는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일본 정부가 공식 인정한 것보다 독립운동의 규모가 더욱 광범위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한국인들은 4만명 이상이 체포돼 일본의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한 소녀는 두 손이 잘렸다. 한국인들은 감옥에서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고 단언했다"고 덧붙였다.
이들 매체는 3·1 운동을 오해로 인해 빚어진 해프닝이나 폭동 등으로 간주한 식민지 본국의 논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독립을 원한다는 이유로 모진 핍박을 받는 한국인들을 비교적 온정적 시각에서 바라본 기사도 적지 않았다.
싱가포르와 쿠알라룸푸르 등지에서 팔리던 일간지 '말라야 트리뷴'(1914∼1951년)은 3월 29일자 신문을 통해 민족대표 33인 중 1명이자 천도교 제3대 교주를 지낸 손병희(孫秉熙) 선생이 체포됐지만 "내가 믿는 원칙과 대의명분을 위해서라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차분한 태도로 진술했다고 적었다.
또, 5월 13일에는 "일본이 몇몇 무지한 이들이 아니라 한국에서 가장 지적인 계층이 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일부 귀족계층도 지위를 버리고 동참했고, (한국의) 모든 계급이 과거 어느 때보다 단결됐다"고 전했다.
이어 "일본은 아직도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가혹한 조처는 처음 운동이 시작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한 모습이다"라고 기술했다.
이 매체는 같은 해 7월 10일에는 중국 베이징 일간지에 게재됐던 기사라면서 '한국에서 석방된 소녀 죄수' 제하의 장문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거리에서 만세를 외치다 체포된 20세 전후 익명 여성의 독백 형식으로 작성된 이 기사는 "(일본인) 경찰이 옷을 모두 벗긴 뒤 두 팔을 등 뒤로 묶고 때리고 찬물을 끼얹길 반복했다. 춥다고 하니 담뱃불로 (몸을) 지졌다. 일부 소녀들은 (거듭된 폭행에 몸이 망가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변해갔다"고 서술했다.
그런 가운데 스트레이츠타임스 1919년 4월 2일자 지면에는 "한국인의 이번 행동은 일본의 지배를 어떠한 이유에서든 원치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줬다. 그런데도 (한국의 독립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논의될 가치가 없는 건이냐"고 묻는 독자의 편지가 투고란에 실려 눈길을 끌기도 한다.
식민 본국 언론의 기사를 시차를 두고 받아쓰는 한계 속에서도 일부 동남아 매체가 이처럼 3·1 운동에 상당한 관심을 보인 데는 식민통치의 굴레에 묶인 동병상련의 처지란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1차 세계대전의 사후처리를 위해 1919년 1월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앞서 우드로 윌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식민지 주민이 원한다면 독립을 허용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지만, 독일 등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됐고 한국과 인도, 동남아권 식민지들은 독립의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제국주의 후발주자로 식민지 경영에서 세련되지 못한 모습을 노출한 일본에 대해 서구 열강이 가졌던 비뚤어진 우월감도 3·1 운동과 관련한 보도가 식민지 당국의 검열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이유일 수 있다.
실제, 동남아 지역 매체들은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등에서 나타난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보도를 하지 않거나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은 마하트마 간디가 이끈 인도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3·1운동 당시 인도는 일본과 동맹관계였던 영국의 식민지였던 터라 3·1운동 관련 소식은 현지 언론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매체 대부분이 3·1운동 소식을 아예 보도하지 않은 가운데 1878년 창간한 남부 유력지 더힌두 정도만이 관련 내용을 전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매체 자체의 시각을 담은 게 아니라 로이터 통신의 기사를 몇 줄씩 소개하는 수준에 그쳤다.
더힌두는 1919년 3월 7일과 3월 18일 로이터 통신 기사를 묶어 '한국 불안'(Korean Unrest)이라는 제목으로 3·1운동을 처음 기사화했다.
기사는 "3월 1일부터 한국에서 시위가 시작됐다", "(고종)황제의 장례식 기간에 심각한 소요(disturbances)가 있었다"는 식으로 일본 정부의 발표를 짧게 전달하는데 그쳤다.
그해 4월 16일자 지면에 소개된 도쿄발 로이터 통신 기사(4월 9일자)는 아예 '폭동'(riots)이라는 단어를 쓰며 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힌두는 3문장짜리 이 기사에서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 한국에서 100여개 이상의 봉기(risings)가 발생했다. 폭도(rioters)들은 곤봉, 도끼 등으로 무장한 채 경찰을 공격하고 관공서를 불태웠다"고 전했다.
더힌두는 이후에도 한국이 독립을 주장했다는 내용(5월 22일자) 등 한국 소식을 간간히 소개했지만 역시 단신 기사로 소화하는 데 그쳤다.
south@yna.co.kr, hwangch@yna.co.kr, cool@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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