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30) 잊혀진 독립운동가 동산 김형기
탑골공원 만세 시위 주도로 '피고인 1번'…학생 중 최고형 선고
이데올로기 분쟁 속 실종…'월북설'에 쉬쉬하다 1990년에 유공자로
(부산=연합뉴스) 차근호 기자 = 부산 사상구 모라동 백양산 자락에 있는 김녕 김씨 유두 문중 재실 앞마당.
그곳에는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동산(東山) 김형기 선생의 추모비가 있다.
매년 3·1절이면 독립운동가 유적지에는 시민의 발길이 잇따르지만 김 선생의 추모비는 늘 쓸쓸했다.
김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면서 후대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다.
김 선생은 6·25전쟁 직후 이데올로기 분쟁이 한창이던 때 정보기관에 연행돼 행방불명 됐다.
김 선생이 연행된 것도 가족들은 신문기사를 통해 뒤늦게 접했다.
이후 김 선생의 생사에 대해 소식이 끊기고 월북했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퍼지면서 김 선생을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등을 돌리거나 김 선생에 대한 언급을 삼갔다.
김 선생의 조카이자 사상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인 조카 김덕규(84)씨는 "워낙 흉흉했던 시대다 보니 백부님을 언급하는 것조차 어려워 업적이 묻혀 버렸다"면서 "백부의 절친한 벗이자 부산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최천택 선생이 자서전에서 '김형기는 맞아 죽었고, 빨갱이가 아니다'는 말을 남겨주지 않았다면 월북했다는 오해가 역사에 남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묻혔던 김 선생의 흔적은 1980년대 말부터 김덕규씨에 의해 하나씩 밝혀졌다.
덕규 씨는 "백부의 업적을 집안사람들도 정확히 모르는 실정이었다"면서 "손자들이 우연히 독립기념관에 갔다가 자신과 본적이 같은 백부의 이름을 봤다고 하길래 왜 독립운동을 한 훌륭한 분의 발자취가 이렇게 묻혀있어야 했나,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30년이 넘게 백부의 발자취를 좇고 있다"고 말했다.
덕규씨는 그때부터 김 선생을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고 국가기록원 등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덕규씨에 따르면 김 선생은 1896년 8월 9일 사상구 모라동에서 태어났다.
사립명진학교와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서울에 상경해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다녔다.
경성의전 4학년에 재학 중 '재경 8도 유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던 김 선생은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피고인 1번'. 당시 만세 시위를 하다 연행된 207명의 학생 중 주동자인 김 선생에게 검찰이 부여한 피고인 번호였다.
덕규 씨는 "3·1운동에 대한 역사 기록이 민족대표 33인의 활약만을 부각하고 있지만, 학생들은 민족대표와 별개로 이미 학생운동을 조직한 상태였고, 이후 민족대표와 대등한 위치에서 이들을 도왔다"고 말했다.
김 선생은 학생 중 최고형인 1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게 된다.
덕규씨가 찾은 김 선생 판결문에는 김 선생이 탑골공원에서 "정치변혁의 목적을 수행하고자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수천인의 군중이 열광적으로 조선독립 만세를 고창하게 하고, 각 곳에서 광분하고 극도의 소란을 피움으로써 치안을 방해했다"고 혐의를 적고 있다.
덕규씨 활동으로 김 선생은 1990년대 비로소 건국유공자 애족장을 받게 됐다.
건국유공자 신청과정에서 보훈청 조사로 김 선생이 부산에서 독립운동가에게 자금을 조달한 사실도 추가로 밝혀졌다.
덕규씨는 "백부께서 탑골공원 시위로 옥살이를 한 뒤 부산으로 내려와 '동산의원'을 차렸고, 이곳을 운영하며 독립 자금을 의열단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보훈청에서 동산의원 소유주가 백부가 맞느냐는 확인 전화가 왔고 이를 통해 백부의 업적을 더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녕 김씨 종친회는 김 선생의 공적이 지역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종친회 한 관계자는 "그나마 2∼3년 전부터는 사상구 생활사 박물관을 통해 지역의 뜻있으신 분들이 3·1절이면 추모비를 찾아와 김 선생의 업적을 같이 기리고 있다"면서 "종친회 차원에서 추모식을 열거나 김 선생의 역사박물관을 만들려고 하는데 자체적으로 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아 국가나 관할 기초단체에서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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