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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속 3·1 운동] ① 그 날 그 함성…통제·조작의 '프레임' 뚫고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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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속 3·1 운동] ① 그 날 그 함성…통제·조작의 '프레임' 뚫고 세계로
일본, 철통같은 보도통제…"조선각지 폭동" 왜곡보도 일관
상하이서 첫 타전…'동병상련' 中언론 "부끄럽다" 전폭 지지
샌프란發 대서특필…NYT·WP 보도 이어지며 美여론 흔들어
러시아 프라우다·이즈베스티야 주목…'식민종주국' 佛언론도 촉각
브라질·멕시코 언론에도 실렸다…식민치하 동남아 언론에도 소개




※ 편집자주 = "조선 독립 만세".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반도 전역을 울렸던 이 함성은 '세계'를 향한 우리 민족의 하나 된 외침이었습니다. 한민족이 앞장서 '행동'함으로써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의 각 민족을 자각시켜 함께 전 세계적 독립운동을 끌어가자는 외교적 호소였습니다. 강대국의 이권 다툼이 판치던 당시 국제질서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을 얻었던 일본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외신 보도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3.1운동 초기 보도통제와 '프레임 조작'으로 관련 보도를 막는 데 그야말로 전력투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문제이지, 진실을 감출 순 없었습니다.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중국 상하이(上海)로부터 시작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 D.C.에 이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러시아 모스크바, 브라질 상파울루, 싱가포르로 3·1운동 소식은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길지 않은 기사도 많았지만 이에 자극받은 각 식민지 국가에서는 앞다퉈 독립선언문이 나오면서 민족적 독립운동이 촉발됐습니다. 비록 한민족이 '자립'(自立)에는 실패했지만, 외신의 창(窓)을 통해 민족 자결과 독립에 대한 세계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 포진한 특파원망을 총동원해 당시 외신 보도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보도합니다. 지금까지 3·1운동을 보도한 외신 일부가 부분적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세계 주요국 별로 보도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세계 종합=연합뉴스) 박세진 차대운 차병섭 옥철 이준서 임주영 유철종 박대한 김용래 이광빈 현윤경 김남권 황철환 국기헌 김재순 특파원 김상훈 김서영 임성호 기자 = 그 날의 함성은 이른바 '제국'(帝國)과 약육강식의 논리에 갇혀 신음하던 세계인들의 혼(魂)을 흔들어깨운 '죽비 소리'였다.
'견고한 둑'처럼 느껴졌던 일제의 엄혹한 보도통제와 교묘한 '프레임' 조작도 결국에는 소용이 없었다. 대한독립을 만방에 알리고 함께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자는 한민족 전체의 일치된 호소는 서서히 지구촌 전체로 타전되며 세계 곳곳 식민지 민중들을 일으켜 세우는 '울림'이 됐다.
3·1운동 당시 아시아 소식을 전하는 외신 특파원들의 주(主) 거점은 일본 도쿄(東京)였다. 그러나 3.1 운동이 일어난 초기 도쿄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잠잠했다. 일차적 보도를 시작한 일본 언론이 3·1운동을 '단순 폭동'으로 매도한 총독부 발표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했고 심지어 일본 정부가 나서 특파원들의 보도를 통제한데 따른 것이다.
당시 아사히신문 1919년 3월3일 자에는 고종의 장례식 사진과 함께 3·1 운동 관련 소식이 처음 등장하는데, 기사 제목은 '야소교도(기독교도) 조선인의 폭동'이었다.
요미우리는 3월 7일 자에서 '조선에 넘쳐나는 학생 소동(騷動) 중대(重大)'라는 제목으로 고종 장례식에 맞춘 학생 행진 소식을 전했지만, 그 후로는 3월 내내 3.1운동 관련 기사가 거의 없었다.



3·1운동 관련 외신보도의 첫 물꼬를 튼 곳은 우리 독립운동의 산실과도 같은 상하이(上海)였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사흘 뒤인 3월4일 상하이 영문 대륙보에 독립운동을 위해 한국인들이 일제히 봉기했다는 소식이 실린 것이다. 3·1운동이 영어(英語) 기사로 세계인들에게 알려진 첫 계기가 됐다.
이어 한국에서 온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독립선언문'을 입수한 중국 언론은 3·1운동에 대한 동정적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국민당 기관지인 민국일보는 3.1운동과 독립선언 사실 보도에 이어 익명의 한인 여학생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독립 호소 편지 전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3·1운동 소식이 국제여론의 주무대였던 미국에 당도한 것은 3월 10일이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진행된 3.1 운동과 민족대표들이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진행한 독립선언식이 있은 지 꼭 9일 만이다. 당시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미국 내의 독립운동 거점이었던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로 발송된 전보(cablegram)를 인용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한국은 파리평화회의에서 독립국임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한국은 이미 3월 1일에 주요 도시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일본의 통제로 그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내용으로 한국의 반일 저항 운동 소식을 일제히 지면에 실은 3월 10일 자 미국 신문의 3.1운동 보도는 확인된 것만 33건에 달한다. 3·1 운동에 대한 현지 언론의 관심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UPI 통신의 전신인 유나이티드 프레스(United Press), 'A.P. 나이트 와이어' 등 뉴스통신 기사를 인용한 당시 신문들은 3.1운동의 실체를 비교적 상세하게 지면에 반영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300만명의 국민과 3천여개 교회가 참여하는 독립협회는 서울과 평양 등 여러 도시에서 독립을 선언했으며, 손병희 이상재 길선주를 파리평화회의에 보내 한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라고 전했다.
또 오클랜드 트리뷴은 '한국이 전 세계에 독립 지지를 요청했다',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는 "3월 1일 일본의 한국 지배 종료 선포", 호놀룰루 스타-불리틴은 '한국인들이 독립을 외친다' 등의 헤드라인을 뽑았다.
지면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일본이 3.1운동 소식의 외부 전파를 막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감시와 경계를 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발행되는 산타아나 레지스터는 "일본의 무선, 전신 통제 때문에 (독립) 선언 소식의 발이 묶였다"는 대한인국민회 고위 관계자의 설명을 기사에 반영했다.
엄혹한 식민통치를 직접 지켜본 미국인 판사는 3.1 운동 발생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만큼 일제의 통제가 극심했다는 뜻이리라.
호놀룰루 스타-불리틴은 3월 11일 자 지면에 한국에서 7주간 적십자 활동을 한 적이 있는 존 A. 매슈먼 판사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에 가본 사람으로서 일본이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시도를 허용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여러 이유로 한국인들이 독립 선언을 했다는 상하이발 기사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매슈먼 판사는 일본이 '프로이센주의'(비스마르크식 군국주의)를 적용해 한국을 혹독하게 통치했고, 호랑이와 여우가 출몰하는 지역에서조차 총기 소지를 금했으며, 학교에서 조차 한국인을 차별했고, 일본식 지명을 강요했다고 회고했다.
어쨌든 상하이발 전보 한 통으로 한국의 독립 선언과 반일 시위 소식은 미국 전역으로 서서히 퍼져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교묘한 '프레임'을 걸어 3·1운동을 왜곡하거나 의미를 축소하는데 열을 올렸다. 특히 3.1운동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타임스) 3월 11일 자 보도에 따르면 주미 일본 대사관은 언론의 사실 확인 요청에 "상하이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독립운동이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아니다. 특별한 일이 없었다"고 부인했다.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 3월 15일 자 1면에 실린 도쿄발 일본계 니푸지지(日布時事)의 기사는 "외국인 선교사의 선동으로 일어선 학생 등 많은 젊은이가 일본에 대항해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헌병에 제압됐다"고 상황을 묘사했다.



당시 국제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영국이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어 아일랜드를 통치하는 것이 일본의 조선 통치와 같은 취지라는 식으로 호도하기도 했다.
윤소영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은 "일본 외무성이 각국 주재 외교관을 통해 미국, 독일 등 정부에 3.1운동 관련 외신 보도를 '유언비어'로 규정하고 보도하지 말라며 정식으로 항의를 한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윤 부장은 이어 "일본은 공문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보도를 통제하려 했다"며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초반에 몇 줄 단신으로 보도된 것 이외에 전혀 보도가 없을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외신들은 외부와 단절된 한국에서 벌어진 3.1운동의 실체를 더듬어 더 상세한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중국 베이징에 상주 특파원을 두고 있던 AP통신의 역할이 컸다.
네브래스카주에서 발행되는 링컨 저널 스타는 3월 13일 자 지면에 "한국의 독립 시위는 일본이 인정한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진행된 것으로 확인됐다"는 베이징발 AP통신 기사를 실었다. 신문은 또 "일본은 3월 3일 고종황제 장례식 때 문제가 불거질 거로 보고 있었지만, 이런 계획을 알고 있던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3월 1일 일본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벌였다. 모든 도시와 마을이 독립 시위대로 넘쳐났다"고 전했다.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도 13일 자에서 소식통을 인용 "한국의 독립운동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평양에서는 시위 중 체포된 학생들이 발가벗겨진 채 십자가에 묶였다"며 시위 확산과 일제의 탄압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그리고 같은 날 뉴욕타임스(NYT)도 사흘간 태평양 너머에서 타전된 소식들을 취합해 3.1운동과 독립 선언 관련 보도를 시작했다.
신문은 3면에 게재한 첫 관련 기사에 "한국인들이 독립을 선언했고, 시위에 가담한 수천 명이 일본에 체포됐다"는 제목을 붙였다.
3월 15일 자 NYT에 실린 오사카발 AP통신 기사는 한국인들이 아직도 일본에 저항해 싸우고 있으며, 4만명 이상이 체포됐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도 상하이에 온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전언을 통해 확산일로의 독립 시위와 일본군의 잔혹한 탄압상황을 묘사했다. 기사에는 시위 도중 독립선언서를 든 한 여학생의 손을 일본 군인이 장검으로 훼손했지만, 이 여학생은 다른 한 손에 선언서를 들고 시위를 계속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한국의 3.1운동이 미국 주요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유럽으로 보도가 이어졌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3월 19일 자에 고종 황제 장례식날 불이 붙은 전국적인 독립운동 소식을 상하이발로, 일본이 한국의 독립운동 보도를 막고 있으며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내용을 각각 도쿄와 오사카발로 전했다.
다만,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에서는 3.1운동 보도가 단순 사실을 전하는 수준에 그쳤다. 독일(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 프랑스(뤼마니테) 이탈리아(코리에레델라세라) 등 다른 유럽국가 언론도 3·1운동 관련 소식을 사실보도 중심으로 전했고, 러시아의 대표언론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도 3·1운동을 통한 한국의 독립운동에 주목했다.
이어 중남미의 브라질(에스타두)과 멕시코(엘 푸에블로), 동남아시아의 싱가포르(더 스트레이츠타임스) 언론의 지면에도 3·1운동 관련 소식이 실렸다.



주목할 대목은 3·1운동 소식이 전해진 이후 일본의 여론조작에 영향을 받은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조선인의 통치능력을 깎아내리는 논조의 보도가 잇따라 등장한 점이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이집트와 한국'이라는 제목의 사설과 LA 타임스가 보도한 일본 태생의 선교사 에드문드 데이비슨 소퍼의 인터뷰가 대표적이다. 두 기사의 논조는 한국이 스스로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없는 미개한 나라라는 주장이다. 한국의 자치 능력을 깎아내리는 이들 기사에 일본이 조직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고토 심페이(後藤 新平) 전 외무상이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한 점으로 미뤄, 일본이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려 '프레임 싸움'을 시도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고토는 3월 22일자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인터뷰에서 "한국이 마치 억압받으면서 자유를 갈구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한국은 서구의 보호를 받는 다른 민족보다 훨씬 자치 능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한국에서 발생한 소요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반란을 선동하는 소수의 광신도에 의한 것"이라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이런 일본의 거짓 주장을 좌시하지 않았다. 당시 뉴욕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헨리 정(정한경)은 일본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의 기고문을 NYT에 싣는다.
그는 "한국인은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있는지 증명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한다"며 "능력이 없다는 가정하에 기회를 박탈하는 건 어린 여자아이게게 수영을 배워야 한다면서 정작 (위험하니) 물가에 가지 말라는 것과 같다"고 적었다.


이영관 순천향대 글로벌문화산업학과 교수는 "일본은 소퍼 목사 등 친일 미국인들 동원해 언론 플레이를 했다"며 "또 3.1운동이 초기에 진압됐다거나 한국을 자치 능력 없는 국가로 묘사하기도 했다"고 짚었다.
이 교수는 "그러나 이승만과 헨리 정 등은 기고문 등을 통해 적극적인 반박에 나섰다"며 "이후 NYT는 친일인사의 기사를 싣지 않았다. 당시 미국 여론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진단했다.
고정휴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는 "미국은 애초 한국 문제를 일본의 내정으로 여기고 간섭하지 않는다"며 "그러나 서재필의 자서전에는 3.1운동 보도 이후 미 국무부가 일본대사를 불러 여론을 환기할 수 있는 조처를 요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전했다.
고 교수는 "이후 일본은 조선 총독을 바꾸고 문화통치를 시작했다"며 "국호도 없는 동양의 작은 나라가 미국 주류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해 일본의 식민지 통치 방향에 영향을 준 건 대단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meolakim@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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