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27) 의로운 기생 33인 '대한독립만세'
주권 침탈·치욕적 건강검진에 분노, 김향화 주도로 화성 봉수당서 거사
"일제에 의해 천한 신분으로 훼손된 기생, 독립운동 조력자 아닌 엄연한 한 축"
(수원=연합뉴스) 김인유 기자 = "29일에 이르러 기생 약 30명이 자혜의원 앞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고 밤에는 상인, 노동자 및 무뢰한 등이 시내 각소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고, 내지인(일본인) 상점에 투석하고 창문을 파괴하는 등 폭행이 심해져 수원 경찰서원과 보병 및 소방 조원이 협력하여 경계 중이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일제 첩보원이 총독부에 보고한 경기 수원지역 '조선소요사건' 보고서다.
술과 웃음을 파는 여성으로 잘못 인식되어온 기생들이 빼앗긴 국가 주권을 되찾겠다며 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기생들이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벌인 것은 수원이 최초였다. 김향화를 중심으로 한 수원 기생 33인이 주인공들이다.
◇ 건강검진 날 순사의 총칼 앞에서도 당당히 "대한독립 만세"
1919년 3월 29일은 김향화 등 '수원예기조합'의 기생 33명이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당시 자혜의원으로 사용되던 화성행궁의 봉수당으로 가던 길이었다.
건강검진이라고는 하지만 치부를 드러내고 성병 검사를 받아야 하는 기생들에게는 무척 치욕적인 날이다.
봉수당은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가 1795년 윤 2월 13일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른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 왕조의 별궁인 화성행궁의 주요 건물을 식민지 통치를 위한 행정기구와 병원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주권이 침탈되고 왕조의 권위가 짓밟힌 것에 분노한 김향화 등 기생 33인은 오전 11시 30분 자혜의원에 도착하자 준비한 태극기를 꺼내 휘두르며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자혜의원 바로 앞 수원경찰서(화성행궁 북군영)에 총칼로 무장한 일본 헌병들이 근무하고 있었음에도 기생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수원기생들의 만세운동은 일본 경찰을 무척 당황하게 했고, 수원지역 시민들을 깜짝 놀라게 한 큰 사건이었다.
당시 수원지역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의 기운이 곳곳에 퍼져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의 '대한독립만세' 함성은 그날 저녁 수원으로 이어졌다.
`방화수류정(일명 용두각) 아래에 모인 지식인, 종교인, 청년 학생, 상인 농민 등 당시 수원면에 사는 주민 수백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후 장날인 3월 16일 팔달산 서장대와 동문 안 연무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 수백명의 수원 주민들은 일제 경찰과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됐고, 주동자는 붙잡혀갔다.
수원 시내에서는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고 '철시(撤市) 투쟁'을 벌이는 등 수원 주민들은 끊임없이 일제에 저항하며 만세운동과 시위를 이어나갔다. 3월 23일에는 수백명의 농민들이 수원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기생들은 자신들의 모임인 수원예기조합과 지척의 거리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지켜보다 3월 29일 건강검진날을 맞아 결연히 일어선 것이다.
기생들의 만세운동이 흔하지 않은 탓에 당시 매일신보는 "1919년 3월 29일 수원기생 김향화와 기생들이 수원화성행궁 봉수당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일본 경찰은 김향화를 기생들의 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했다.
김향화는 2개월여간 고문을 받다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져 재판을 통해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과 같은 감방에 수감된 것으로 전해진다.
1919년 10월 27일 가출옥되어 수원으로 돌아온 김향화는 이후 서울로 옮겨가 살다가 1950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향화를 포함한 33인의 수원기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사실과 그들의 인적사항은 이동근 수원박물관 학예사의 연구 끝에 90년만인 2008년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동근 학예사는 "수원기생들의 3·1운동은 관기의 후예와 전통예능의 전수자들이 보여준 민족적 항쟁이었으며, 일제의 강압적인 기생제도와 식민통제에 대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라고 평가했다.
◇ 일제가 만든 천한 이미지의 기생…만세운동의 주축으로 재평가
기생이 천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일제에 의해 왜곡됐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기생의 역사를 정리한 책인 '조선해어화사'에서는 기생을 '해어화(解語花)'로 부른다. 해어화란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본래 미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말이 나중에 기생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는데,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와 춤 등으로 흥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를 일컫는 말로 '예기(藝妓)'와 함께 쓰였다.
예기들은 예술적 능력뿐 아니라 학문, 사회적 이슈에도 밝았다. 만세운동을 이끈 수원기생 김향화도 가곡,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를 잘했고 검무와 승무, 정재(궁중무용)도 잘 추고, 서양악기였던 양금도 잘 쳤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관기(官妓) 제도를 만들어 교방이라는 곳에서 기생들에게 춤, 노래, 시, 서화, 올바른 행동 등을 교육했다.
그러나 일제는 우리의 전통적인 관기 신분이던 예기와 매음녀인 창기(娼妓)를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공창제를 강화했다.
기생을 조합으로 편성해 식민지배의 통제 아래 두었다. 천한 기생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김향화 등 33인의 수원기생이 만세운동의 주축세력이었다는 사실이 이동근 수원시 학예사에 의해 밝혀지면서 기생의 이미지가 새롭게 평가됐다.
2008년 경기도로부터 '수원지역 여성과 3·1운동 학술 심포지엄' 발표를 의뢰받은 이동근 학예사는 "1919년 3월 29일 수원기생 김향화와 기생들이 수원화성행궁 봉수당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매일신보의 기사 한줄을 단서로 이들의 실체를 찾아 나섰다.
기생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선미인보감'이라는 귀중한 책을 찾아냈다. 조선미인보감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가 1918년 발간한 책으로 당시 기생조합에 소속된 680여명의 기생 나이와 사진, 기예를 소개하고 있다.
김향화를 포함한 33인의 수원기생 프로필도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
이동근 학예사는 국가보훈처에 요청해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됐던 김향화와 조선미인보감의 김향화가 동일인물임을 확인하고, 2008년 11월 7일 심포지엄에서 김향화 등 수원기생 33인의 이름과 사진, 만세운동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는 "수원기생들이 만세운동의 주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전율이 일고 너무 기뻐서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다"라고 회고하면서 "천한 이미지와 동시에 많은 기예를 가진 기생을 3·1운동의 주체로서 역사적으로 재평가할 수 있게 돼 매우 보람 있는 연구였다"라고 말했다.
이어 "일부 영화에서 기생은 독립운동가를 돕는 조력자의 모습으로 나오지만, 수원기생을 대표하는 김향화는 독립운동 조력자가 아닌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의로운 기생'이자 '독립운동가'였다"라면서 "일제가 만든 왜곡된 이미지의 기생을 새롭게 평가하고 그들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수원시는 이동근 학예사가 연구해 발굴한 수원기생의 만세운동 자료를 바탕으로 2008년 국가보훈처에 김향화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했고, 정부는 이듬해 김향화를 독립유공자 훈·포장을 지급했다. 그러나 김향화의 훈·포장은 그의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 수원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다음은 만세운동에 참여한 수원기생들의 명단이다. 괄호안은 만세운동 당시 나이.
▲ 김향화(23) ▲서도홍(21) ▲ 이금희(23) ▲ 손산홍(22) ▲ 신정희(22) ▲ 오산호주(20) ▲ 손유색(17) ▲ 이추월(20) ▲ 김연옥(18) ▲ 김명월(19) ▲ 한연향(22) ▲ 정월색(23) ▲ 이산옥(19) ▲ 김명화(17) ▲ 소매홍(20) ▲ 박능파(17) ▲ 윤연화(19) ▲ 김앵무(16) ▲ 이일점홍(16) ▲ 홍죽엽(18) ▲ 김금홍(17) ▲ 정가패(17) ▲ 박화연(19) ▲박연심(20) ▲ 황채옥(22) ▲ 문농월(21) ▲ 박금란(18) ▲ 오채경(15) ▲ 김향란(18) ▲ 임산월(17) ▲ 최진옥(19) ▲ 박도화(23) ▲ 김채희(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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