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조성미 기자 = "말할 때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 거야 이제 워낙 흔한 일이니 그러려니 해도 글씨까지 영어로만 써 놓으면 우리 또래들은 정말 답답해요." (전영국씨ㆍ71세)
전씨는 얼마 전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탔다가 낯선 광경을 봤다. 신형 버스라 못 보던 형태의 하차벨이 달려 있었는데 알파벳으로 'STOP'라고만 표기돼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버튼 밑에 한글로 '하차벨'이라고 쓰고 손가락 그림이 버튼을 가리키는 안내 스티커가 붙어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무 표시나 설명이 없는 채였다.

공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자신은 'STOP' 같은 기본적인 영어단어는 읽을 수 있지만 영어를 모르는 동년배 노인들이 보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안고 버스를 내렸다.
서울시는 일부 신형 버스에 영문으로만 표기된 하차벨이 부착돼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서울시 버스정책팀 관계자는 31일 "아직 확인한 바는 없는데 현황을 파악해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한글 병기) 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밝혔다.
영문으로만 표기된 하차벨이 부착된 버스를 운행하는 J교통 관계자는 "새로 버스를 도입하면서 하차벨에 영어만 쓰여 있어 한글로 된 안내 스티커를 일일이 붙였는데 미처 부착하지 못한 버스가 있는 것 같다"며 "서울시나 교통 당국에서 하차벨 표기에 대해 어떻게 하라는 지침을 받은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하차벨 사례처럼 사물 표기를 영문으로만 하는 경우가 최근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영어 단어나 표현을 우리말에 섞어 쓰는 일이 빈번해지면서부터다. '영문으로 쓰는 게 더 좋거나 예뻐 보여서' 또는 '우리 사회도 국제화됐으니까' 등 간단한 이유로 설명되지만 이로 인한 소외는 간단치 않다.

'코리아 그랜마'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인기 유튜버 박막례(73)씨는 최근 올린 동영상에서 맥도날드가 새로 도입한 자동주문 기계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기계 작동법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작은 글씨로 써놓은 주문 시스템이 영 낯설었던 것. 당황한 할머니는 함께 간 손녀에게 "그냥 집에 가자"고 애원하기도 한다.
영문으로만 표기해놓은 예는 동영상에 등장하는 자동주문기 화면에서도 보인다. "Please select your language."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덧 익숙해져서 별생각 없이 봤던, 영어로만 쓰여 있는 제품 포장지, 간판, 음식점 메뉴 등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도봉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유모(46)씨는 "영어로만 쓰여 있는 간판이나 포장지 때문에 답답한 건 꼭 노인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도 아니다. 길을 걷다 보면 무슨 소리를 써놓은 건지 모르겠는 게 너무 많다"고 하소연했다.
최근 일부 신축 아파트 단지에서 관리사무소에 'Management Office', 주민 공용공간엔 'Community Center', 노인정엔 'Senior Club'이라고 영문으로만 된 표지판을 붙여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과도한 영문 표기를 금지해 달라는 청원이 등장하기도 했다.
oldpi****라는 아이디를 쓰는 트위터 이용자는 "요즘 가게 안내문, 메뉴판 등이 영어로만 돼 있는 걸 종종 본다. 간단한 거지만 그래도 최소한 한국어를 같이 써줬으면… 영어를 배우지 못한 이들이 그걸 보고 돌아설 때의 마음, 느끼게 하지 않았으면"이라고 말했다.
밀*라는 누리꾼도 자신의 트위터에 "영어로만 적혀있는 표지판, 식당 메뉴, 극 중에서 영어가 섞여 나와도 번역되지 않는 영화, 드라마, 뮤지컬들… 어쩌다 엄마가 한 번씩 뜻을 물어보는데 아마 계속 나오는 것을 참다가 한번씩 물어보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국립국어원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국민 생활과 밀접한 분야에서 한글 병기 없이 외국 문자만을 노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해당 외국어를 모르는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이해할 우려가 있다"며 "알기 쉬운 우리 말로 쓰거나 꼭 외국어를 사용해야한다면 한글을 병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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