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우리동네] 달동네 광주 발산마을…개성 발산 '핫플' 변신
근현대사 굽이마다 애환 가득…주민·청년 똘똘 뭉쳐 활력 되찾아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광주 서구 양3동 발산마을은 구한말까지 군분면 연예리로 불리던 광주천 하류에 터를 잡았다.
마을을 낀 양동 일원은 일제강점기 큰 장이 서기 시작하면서 황무지였던 갈대밭이 시가지로 변모했다.
마을 이름 발산(鉢山)은 뒷산이 공양 그릇인 바리를 엎어놓은 형상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지금은 복개공사로 볼 수 없지만 마을을 가로지르는 광주천에 발을 치고 고기를 많이 잡아 발산이라는 지명을 얻었다는 견해도 있다.
작은 마을이었던 발산은 6·25 한국전쟁 이후 몰려든 피난민으로 주민 수가 급격히 불어났다.
1960년대 들어 광주천 건너 방직공장들이 호황을 이루자 마을은 또 한 번 산비탈을 야금야금 축내며 팽창했다.
그러나 방직공장에서 만들던 광목을 찾는 사람이 줄고, 젊은이가 일자리를 찾아 떠나면서 발산마을은 1990년대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광주시민조차 아는 이가 드문 낙후 마을로 쇠퇴하면서 '발산으로 갑시다'를 못 알아들은 택시기사가 '양3동'이라는 설명에 6㎞ 떨어진 북구 '양산동'으로 차를 몰았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화창한 밤마다 별이 총총히 떠올라 '별마루'라고도 불린 발산마을은 쇠락기에 접어든 와중에도 체조영웅 양학선을 비롯해 곳곳에서 꿈을 펼치는 청년들을 길러냈다.
낡은 동네가 젊은 예술가를 불러모아 개성과 활력을 발산하는 마을로 거듭나게 된 기적은 한데 모여 꼼지락거리며 마을을 가꾼 어르신 공동체에서 싹이 텄다.
"우리가 매달 20만원씩 노령연금을 받는데 노인이라고 나라에서 주는 돈만 받지 말고 천변길에 난 풀이라도 매자고 했지. 외지에서 온 사람이 오가며 봤을 때 좋지 않은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하지 않겠냐 한 거야. 나라 사랑이 뭐 별거여. 내 동네 깨끗하게 하는 것부터지."
마을공동체에서 활동한 한 어르신은 마을 역사를 돌아보며 풀매기에 나섰던 2006년을 이렇게 떠올렸다.
광주시는 지역의 대표적인 달동네 발산마을에 찾아온 변화상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예술인촌 조성 사업을 추진했다.
단순히 물리적 주거환경만 바꾸지 않고, 주민 참여와 역량 강화로 변화를 지속하는 마을 토대 만들기에 나섰다.
국토교통부와 서구청이 함께 나선 새뜰마을사업, 현대자동차그룹의 공공미술프리즘사업도 잇따르면서 마을재생이 본격화했다.
2천232가구 중 홀로 사는 집이 740가구에 달하고 폐·공가는 28채, 주민 약 40%가 취약계층이었던 마을은 주민 일상에서 잊힌 공동체 문화가 되살아난 청춘발산마을로 탈바꿈했다.
마을 전체를 도색하고 마을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굴해 주민과 청년이 함께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벌였다.
1970년대 발산마을 여공(女工)들의 꿈과 희망을 현세대의 꿈으로 재해석한 '마을 텍스트' 프로젝트를 펼쳐 동네 풍경을 바꿨다.
서구청은 사람이 떠난 빈집을 사들여 청년 기업 입주를 지원했다.
식당·카페·미술관·예술작업공간 등 다양한 업종의 청년 기업이 2016년 3팀, 이듬해 10팀이 입주했다.
문화공동체 공간인 '청춘빌리지'가 문을 열면서 주민과 창업 청년이 한자리에 모이는 구심점도 마련됐다.
주민, 청년은 소통과 협업을 위한 반상회 '가마솥부뚜막공동체'를 꾸렸다.
함께 밥 짓고 나눠 먹으며 정을 나누고 마을사업을 함께 고민한다.
청춘발산마을은 불과 수년 사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광주 가볼 만한 곳', '사진 찍기 좋은 마을', '주민과 청년이 공존하는 마을'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도시재생 성공 이후 매달 6천여명이 발산마을을 방문했고, 주택 공실률은 36% 줄었다.
26일 장종연 청춘발산마을 주민대표협의회장은 "방직공장 여공들이 아슬아슬 광주천을 건넜던 뽕뽕다리와 양학선 선수가 성장기를 보낸 집을 되살리는 등 애환 서린 스토리텔링으로 마을재생을 이어가겠다"며 "많이들 구경 와주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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