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수형인 '공소기각'…군사재판 불법인정 첫 사법적 판단
나리꽃 가슴에 달고 진실규명.무죄입증…70년만에 명예회복
보상방안 담은 제주4.3특별법 처리 탄력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부당한 국가 공권력에 의해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4·3 생존 수형인 18명이 재심 끝에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다.
85∼99세 고령의 몸을 이끌고 2년 가까이 법정 다툼을 벌인 끝에 얻어낸 값진 결과다.
이번 판결로 아직까지 재판에 나서지 못한 나머지 10여명의 생존 수형인들의 재판과 4·3 진상규명,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 억울한 70년 세월 "수형인 한(恨) 풀 수 있다면"
2017년 4월 19일이었다.
주름이 깊게 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4·3 당시 군법회의 재심청구서'라고 적힌 봉투를 들고 제주지방법원을 찾았다.
이들은 제주4·3을 폭동으로 규정한 계엄령하의 군사재판 자체가 위법했고 불법 구금과 고문 등으로 모든 것이 조작됐다고 주장하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청구인은 수형 희생자 중 현재 생존해 있는 임창의(99·여)·정기성(98)·오계춘(99·여)·조병태(91)·박동수(87)·김경인(88·여)·김순화(87·여)·김평국(90·여)·박내은(89·여)·박순석(92·여)·부원휴(91)·양근방(85)·양일화(91)·오영종(90)·오희춘(87·여)·한신화(98·여)·현우룡(85)·현창룡(88)씨 등 18명(이상 가나다순).
그날 제주시 조천읍 와산리 출신인 양근방 할아버지는 기자회견에서 "빨갱이니, 좌익이니, 삼팔선이니 아무것도 몰랐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살았다"며 "눈 감기 전에 수형인이라는 억울한 한을 풀어야겠다"고 말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제주 4·3 수형 피해자들 70년만에 '무죄' 선고/ 연합뉴스 (Yonhapnews)
85에서 99세에 이르기까지 고령의 청구인들은 1948∼1949년에 내란죄 또는 국방경비법 위반 등 누명을 쓰고 징역 1년에서 최대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의 억울한 사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절했다.
전주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 오계춘 할머니는 1948년 겨울 군경이 닥치는 대로 마을 사람들을 잡아 죽이자 무조건 아이를 업고 도망쳤다. 며칠을 떠돌다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 재판을 받고 전주형무소로 보내졌다.
오 할머니는 "배에 태워져 가던 중 굶주린 아기가 죽었다. 죽은 아이를 목포 길거리에 두고 온 생각만 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현창용 할아버지는 1948년 9월 26일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임의로 작성된 조서에 지장을 찍었다.
죄명은 내란죄였다.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인천형무소에서 복역 중 한국전쟁이 나면서 도망쳐 천신만고 끝에 살아났다.
현 할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딸이 법학과를 나와 취직하게 됐는데, 신분 조회를 하니 나의 (내란죄) 기록이 나와서 채용이 안 됐다. 그때 참 기가 막히더라"라고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들은 그렇게 70년이란 긴 세월을 버텼다.
◇ 4·3 군사재판의 부당성 이끌어내
재심 결정이 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청구인들이 교도소에서 구금된 근거를 유추할 기록으로는 이름과 당시 나이·형량·수감교도소 등이 기재돼 있는 수형인명부와 국가기록원 등을 통해 입수한 수형 관련 문서가 일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들이 구금 생활을 한 것이 판결에 의한 형의 집행으로 이뤄졌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판결문 등 자료가 전무해 재심이 이뤄질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눈길을 보내는 이들도 많았다.
법원은 1년 5개월이 지난 2018년 9월 3일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백 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대표되는 형사소송의 기본 이념을 내세워 "법률이 정한 재심 요건에 일부 우려가 있음을 들어 청구인들이 신원을 회복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은 법관의 임무를 외면하는 결과가 된다"며 이같이 판시했다.
다시 해를 넘겼다.
수형인들은 2년 가까이 법정 다툼을 벌인 끝에 17일 재판이 끝나자 가슴에 '진실', '순결'이란 꽃말을 가진 나리꽃을 달았다.
재판을 가까이서 도운 시민단체가 '진실을 드러내 무죄임을 밝혔다'는 의미로 나리꽃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가슴에 달아드린 것이다.
고령의 몸을 이끌고 가슴에 묻어뒀던 한을 꺼내 당당히 재판에 나선 이들의 용기가 제주4·3 당시 계엄령하에 이뤄진 군사재판이 불법임을 인정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을 이끌어냈다.
지금껏 군사재판이 불법임을 수차례 확인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행정기관의 판단에 그쳤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로 앞으로 제주4·3의 완전 해결을 위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활동도 탄력을 받게 됐다.
◇ "완전한 4·3 문제 해결 시발점 되길"
제주4·3 생존 수형인들의 '불법 군사재판 재심' 청구를 이끈 출발점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수형인명부의 발견이었다.
1999년 9월 15일 추미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이 수형인명부를 발견하면서 4·3 당시 부당한 국가 공권력에 의해 타지로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희생자들의 실체가 드러났다.
군사재판에 의한 4·3수형인은 2천530명에 이르며 상당수가 행방불명되거나 옥고로 숨졌다.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제주4·3 도민연대)가 오랜 기간 생존자들을 파악한 결과 그 수는 30여명이다.
이번 판결로 재판에 나서지 못한 나머지 10여명의 생존 수형인들 역시 용기를 얻어 재판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고령으로 인해 상당수가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이들의 명예회복이 하루빨리 이뤄질 수 있도록 절차를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이들의 재판 진행 등 모든 비용을 시민단체가 감당했던 만큼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실정이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제주 4·3특별법) 개정안의 처리도 서둘러야한다.
2017년 12월 제주4·3 70주년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제주4·3특별법 개정 작업이 추진됐으나 아직도 국회 계류중이다.
개정안은 '명예회복 및 보상' 조항을 신설, 국가로 하여금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지체 없이 시행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한 '제주 4·3 수형인에 대해 진행한 군사회의(재판) 일체를 무효로 한다'는 조항도 있다.
4·3특별법이 개정되면 재심 판결을 받은 당사자 18명 외 나머지 생존자는 물론 숨진 수형인 유족들이 사법부의 판단을 구하지 않더라도 사실상 무죄를 받게 된다.
재판을 이끈 양동윤 제주4·3 도민연대 대표는 "이번 판결이 지금껏 지지부진한 4·3특별법 개정안 처리를 비롯해 4·3 문제가 풀리는 중요한 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bjc@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