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계미투] "메달보다 사람"…엘리트 체육 시스템 대수술 필요
성적 지상주의·체육계 침묵의 카르텔에 고착화한 체육계 폭력
"개인보다 국가, 인권보다 성적 우선시하는 시각 바꿔야"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쇼트트랙 대표팀 전 코치의 성폭행 의혹으로 촉발된 '체육계 미투' 움직임은 체육계에 만연한 성폭력 등 폭력의 실태를 다시금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국민적 관심과 문제의식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문제는 이러한 충격도, 분노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슷한 문제가 터질 때마다 가해자는 처벌 받고, 관계기관은 대책을 내놓았으며,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지만 근본적인 해법은 찾지 못한 채 데자뷔처럼 같은 일이 반복됐다.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이번 기회에 엘리트 체육 시스템을 크게 손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 '성적지상주의' 엘리트 체육의 폐해
조재범 전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의 심석희 성폭행 의혹이 폭로된 이후 체육계 안팎의 관계자들은 이번 사건이 체육계의 폐쇄적인 구조나 성적지상주의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부'가 돼 사실상 외부와 격리된 채 성인이 될 때까지 운동에만 매달리는 현 엘리트 체육 시스템은 체육계 폭력을 양산하는 토양이 됐다.
학교와 지방자치단체, 나아가 국가의 요구 속에 성적내기에 급급하느라 개인의 인권은 뒷전이 됐고 지도자와 선수는 주종 관계로 변질했다.
'때려서라도 성적을 내야 한다'는 인식 속에 일상화한 폭력은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진다.
미숙한 상태에서부터 폭력과 주종관계에 익숙해진 선수들은 성인이 되더라도 선뜻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된다.
임수원 경북대 체육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체육 분야에선 인권이라는 가치가 상당 부분 무시됐다"며 "우리 체육계의 선수 양성 과정을 보면 권위적인 위계체계 내에서 학생이 지도자에 감히 불복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고 꼬집었다.
임 교수는 지난 2015년 한국체육학회지에 게재한 논문 '엘리트 스포츠 내 성폭력 발생 기저와 경험체계 탐색'에서 성폭력 피해자와 조사 담당자 등을 대상으로 엘리트 체육 내 성폭력의 가능하게 한 요인들을 짚었다.
이 논문에서는 ▲ 절대적 권력 관계의 공고화 ▲ 잦은 신체접촉과 성적 수치심의 수용 ▲ 성폭력 행위에 대한 지도자의 인식 부족 ▲ 합숙 훈련의 훈련체계를 그 요인으로 열거했다.
결국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환경 속에서 선수들은 지도자 등이 아무 죄의식 없이 저지르는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체육계 '침묵의 카르텔' 속 기댈 데 없는 선수들
체육계 음지에서 행해지던 폭력 문제가 이따금 수면 위에 올라온다고 해도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나 피해자 보호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일단 선수들은 폭력에 노출돼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에 성폭력 등 피해자를 위한 신고센터가 마련돼 있으나 그 존재조차 모르는 선수들이 많고 신고도 극히 저조하다.
대한체육회가 최근 발표한 2018년 스포츠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표팀 내 성폭력 문제를 담당하는 체육회 산하 스포츠인권센터의 존재를 아는 지도자는 26.7%에 그쳤고 선수와 학부모 사이에서의 인지도는 더 낮았다.
이 조사에서 성추행이나 성폭력을 당했다는 국가대표 응답자 31명 가운데 신고기관에 이를 먼저 알렸다는 선수는 1명에 그쳤다.
용기를 내 공론화를 하더라도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에 그치거나 그나마도 이후에 유명무실해지기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진 징계의 주체도 체육계 인사인 경우가 많아 온정주의에 사로잡힌 결정을 하기도 하고,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냈다는 이유로 형이 감경되기도 한다.
조 전 코치의 경우도 1심 재판부가 실형을 선고하면서도 '지도받은 선수들이 성과를 낸 점'을 양형 이유에 포함해 논란이 됐다.
징계 인사에 대한 복권도 기준 없이 진행되고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김영주 의원의 지난해 대한체육회 국감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체육단체가 비리나 폭력 등을 이유로 내린 860건의 징계 중 복직이나 재취업한 사례가 24건, 징계 후 복직이나 재취업한 사례도 299건에 달했다.
폭력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현장으로 돌아오는 가해자를 보면서 피해자도 더욱 신고를 꺼릴 수밖에 없게 된다.
◇ 엘리트 체육 구조에 대한 근본적 성찰 필요
수없이 반복된 제도와 대책도 체육계 폭력을 근절하는 데 실패하면서 현재 국가 주도의 엘리트 체육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국제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것이 국위를 선양하는 것이고, 이것이 개인을 뛰어넘는 절대가치라는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동호 스포츠문화연구소 소장은 "우리 사회는 민주화와 정권 교체를 거치며 시민사회가 전면에 등장하고 개인과 인권을 얘기하게 됐다"며 "그러나 주류 교체가 없었던 체육은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국위 선양만을 얘기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는 체육계 주류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한데, 정치권력 역시 국제대회에서의 선전이 통치에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이를 방조하면서 결국 체육계가 인권 사각지대에 놓이게 됐다는 것이다.
임수원 교수도 "사회적으로 인권 의식이 높아졌지만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자라고 운동했던 기성세대 체육인들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적보다 인권을 우선시하고 강압적인 분위기에서가 아니라 즐기며 하는 체육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국제대회에서의 메달이 국가적 과제라는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올해 정부의 체육 예산은 1조4천647억원으로 이중 전문체육 예산은 3천490억원이고, 생활체육 예산은 8천44억원이다. 전문체육 예산은 전년도보다 6.5%, 생활체육은 56.7% 늘어 생활체육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졌지만 여전히 해마다 수천억원의 예산이 엘리트 체육에 투입되고 있다.
국가 주도의 엘리트 체육 육성을 보는 시각은 분분하다.
국제 스포츠대회에서의 선전이 주는 부수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관점에서는 엘리트 체육의 근간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쿄올림픽을 준비하는 이웃 일본이나 영국도 엘리트 체육 육성에 힘써 국제대회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도 했다. 결국 국가 차원의 지원과 육성이 단기적으로 성적을 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최동호 소장은 "국제대회 성적이 저조할 때마다 기득권층은 '엘리트 체육의 위기'를 강조하곤 한다"며 "국제대회 때마다 국민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 소장은 이어 "개인의 인권을 위해선 생활체육 위주로 가야하며 이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성적이 떨어질 수는 있지만 곧 건강한 토대를 갖춰 장기적으로는 성적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국민적 설득작업도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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