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기억] ③서서갈등도 '상호성·인권'…불신임투표·위헌소송까지
신동방정책 초기 보수진영·실향민 강력 반발속 여론은 전반적 지지
여론, 對서방 외교도 만족…보수언론, 동독에 대한 차관 긍정평가
진보정권은 동독 인권문제, 보수정권은 경제지원에 전향적 자세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ㆍ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봅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앞으로 1년간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7∼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갑니다. '서서갈등의 전개 및 극복과정'을 주제로 한 첫 시리즈로 6개의 기사를 6일간 연재 중입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① 장벽만큼 높던 '서서갈등'의 해빙…東西공존 아우토반 닦아
② 동독의 '봉' 서독, 대가는 시민편익…경제의존도 키워
③ 서서갈등도 '상호성·인권'…불신임투표·위헌소송까지 ←←
④ 박명림 "北만큼 野대화 중시필요…비핵-북미수교 교환해야"
⑤ 前전독일연구소장 데틀레프 퀸…"南시민의 北방문 자유 인정 필요"
⑥ 30년전 서독청년…"장벽 무너질 때 금맥 발견한듯"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분단체제에서 대북정책을 놓고 벌어지는 '남남갈등'은 한국사회가 풀어야 할 지난한 숙제로 지목돼왔다.
해방 후 일제의 잔재 청산이 실패하고 좌우간 대결구도가 형성된 데다, 미증유의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 속에서 이념과 대북정책을 놓고 한국 사회는 둘로 찢어졌다.
이런 대결적 구도는 사회가 고도화되는 과정에서도 일상적인 사회 영역으로까지 번지며 무수한 폐해를 낳고 있다.
반세기 전 독일의 분단체제 속에서의 서독도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내부갈등을 겪었다.
동서독에는 민족상잔의 비극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반도 만큼 갈등의 골이 깊지 않았지만, 서독 내에서도 대(對)동독정책을 놓고 치열한 대결적 구도가 전개됐다.
그러나 극으로 치닫던 '서서갈등'은 정치권의 노력과 헌법재판소의 판결, 동독과의 평화 및 교류·협력을 골자로 하는 신동방정책에 손을 들어준 국민 여론 속에서 진정국면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 '동독의 상응행위·인권문제' 야당의 일관된 비판
서서갈등의 전개 국면에서 주요 테마 중 하나는 남남갈등과 비슷하게 상호주의적이지 않고 서독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다는 점이었다.
인권 문제도 내부갈등의 주요 소재였다.
진보성향인 사회민주당 소속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69년 집권한 뒤 소련 등 동구권 국가와의 관계 개선에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신동방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이는 국내적으로 정치적 긴장감을 유발했다.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69년 10월 28일 시정연설에서 신동방정책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자 보수 야당인 기독민주당 대표인 라이너 바르첼은 다음날 브란트에게 서한을 보내 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다.
신(新)동방정책의 구체적인 첫 성과물로 동서 긴장 완화의 서곡을 알린 소련과의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야당은 강력히 반발했다.
협상 타결 두 달 전 협상 내용의 상당 부분이 언론에 유출되면서 정치권은 요동쳤다.
특히 폴란드의 오데르-나이세 강을 폴란드의 서부 국경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에 대해 보수진영의 반발이 컸다. 나치 패망 이전 독일의 영토였던 슐레지엔을 폴란드 영토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실향민 단체가 거세게 들고일어났다.
바르첼 대표는 1970년 6월 17일 연방의회 토론에서 유출된 문서 내용에 대해 분단을 더 심화하고, 서독의 조처에 대한 소련의 상응 행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며 비판했다.
같은 해 8월 바르첼은 모스크바 조약 체결식 이틀 전인 10일 브란트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상응 행위를 찾아볼 수 없다면서 국민에게 이전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야당은 모스크바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베를린의 지위가 여전히 불분명한 데다, 결국 유럽을 사회주의 체제로 이끌게 될 것이라고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 지도부는 모스크바 조약 서명식에 초청을 받았으나, 서명식 장소인 모스크바행 항공기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여론은 모스크바 조약 체결을 위한 정부의 움직임을 지지하고 있었다.
1970년 3∼4월 여론조사기관 알렌스바흐가 2천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정부가 동독 등 동독권과의 협상에서 너무 빨리 양보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변은 응답자의 23%에 불과했다. 43%는 '아니다'고 답변했고 나머지는 의견이 없다는 답변이었다.
야당은 모스크바 조약이 헌법 격인 기본법을 위배한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조약에 인권 문제에 대한 언급도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야당은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등 2차 세계대전 전승 4개국이 서독과 서베를린 간, 서베를린과 동독지역 간 인적·물적 이동을 확대하는 내용으로 1971년 9월 3일 체결한 '4대국 협정'에 대해 서베를린에서 서독 정부 관련 기관들을 철수하기로 한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모스크바 조약 이후 소련의 충분한 상응 행위가 없다는 비판을 다시 꺼냈으나, 전승 4개국이 체결한 협정인 만큼 다소 누그러진 톤이었다.
야당의 비판은 기본조약의 체결(1972년 12월 21일)을 앞두고 정점에 이르렀다.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은 조약 체결인 12월 7일 원내교섭단체 결정문을 내고 동독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게 되는 반면 동독의 악화하는 인권 문제를 호전시킬 내용이 조약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바르첼 대표는 1973년 6월 12일 기독민주당 행사 연설에서 "장기적으로 사민·자민당 연정의 신동방정책은 나토의 군사방어에 대한 준비태세를 떨어뜨리고 서독이 동구권과 서구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되는 데다, 나아가 공산주의적 동구권과의 친화를 통해 서독 내 마르크스주의를 강화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야당의 이런 주장 역시 여론의 흐름과는 동떨어졌다.
알렌스바흐가 1972년 8월 2천 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정부가 동구권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반면, 서방과의 관계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질문에 응답자의 55%는 '아니다'고 답변했다. '그렇다'는 답변은 28%에 불과했다.
서독 국민은 대체로 정부가 서방국가와의 후방 외교를 탄탄히 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진 셈이다.
정치적으로도 야당은 1971년 4월 27일 연방하원에서 브란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투표를 진행했으나 패했다.
결국 같은 해 5월 17일 모스크바 조약에 대한 연방하원 비준 투표에서 496명의 의원 가운데 248명이 찬성해 간신히 비준이 이뤄졌다.
야당은 기본조약에 대해서도 헌법소원을 제기했으나, 연방헌법재판소는 1973년 7월 1일 정부의 손을 들어주면서 기본조약에 대한 갈등도 잦아들었다.
◇ 1980년대 보수 정권서도 갈등 완화…동서관계 발전에 소련 반발도
사회민주당과 자유민주당의 연정체제는 경제정책 등을 둘러싼 갈등으로 깨지면서 1982년 10월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과 자유민주당 간의 새로운 보수 연정체제가 등장했다.
정권교체는 1983년 3월 총선에서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과 자유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함에 따라 이어지게 됐다.
1970년대 초반 동방정책에 격렬히 반대했던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은 정권을 잡은 후 동방정책을 계승했다.
당시 여론이 동방정책을 지지하는 상황에서 새 정부가 이를 역행할 수는 없었다.
알렌스바흐의 1981년 5월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55%가 '동독과의 화해정책이 지속돼야 한다'고 답했다.
다만, 새 여당은 베를린 장벽에서 탈주자를 향한 총격 등 인권 문제를 중시해 이전 정권과 차별화했다.
이때부터는 여야는 신동방정책을 놓고 상호 간의 견제보다는 그 틀 속에서 더 나은 정책을 제시하기 위한 생산적인 경쟁 체제로 들어섰다.
중거리핵미사일의 배치 문제로 동·서 진영 간 극심한 갈등을 겪는 상황에서도 동서독 교류·협력은 진전을 보였다.
당시 헬무트 콜 총리가 이끈 보수 정권은 교류·협력을 강화해 군사적 긴장 상황이 심해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서독 정부는 1983년과 1984년 경제위기가 심각한 동독에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차관을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동독 측의 체면이 깎이지 않도록 서독중앙은행이 빌려주고 서독 정부가 지불보증을 하는 방식을 택했다.
차관 제공으로 동독은 더욱 경제적으로 서독에 의존하게 됐다.
동서 냉전구도가 다시 강화되는 시점에 도리어 동서 관계가 긴밀해지자 소련이 반발하기도 했다.
서독의 차관 제공 직후인 1984년 8월 당시 연합뉴스 기사는 "소련의 공산당기관지 프라우다는 서독이 경제적 수단을 이용해 동독의 주권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특히 차관 제공 과정에서 대표적인 보수 정치인이자 신동방정책의 반대파였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기독사회당 대표가 차관을 주선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보수 세력 내에서 동독체제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해진 배경이 뒷받침했다. 외무장관 자리를 노리던 슈트라우스가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는 차원이라는 해석도 당시 제기됐다.
다만, 당시 기독사회당 내부에서 차관 제공에 반발한 의원 2명이 탈당을 하는 등 보수 세력 내부에서 반발이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갈등에 대해 보수성향의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의 1984년 7월 27일 기사에서는 차관 제공과 관련한 갈등에 대해 "유럽에서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대의에서 동서독 관계를 위한 노력은 중요하며, 동서독 관계의 정상화와 현재 상황은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이를 이루기 위한 노력은 길게 보고 이뤄져야 한다는 데 (보수 세력의) 의견이 모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동독은 차관을 받은 대가로 동서 국경 지역에서 5만4천여 개의 자동발사장치를 제거하고 서독인들의 여행 규제를 완화했다. 다만, 동독 측은 차관의 대가라는 점을 명시하지 않았다.
물론 서독 정부의 차관 제공에 대해 서독 내에서는 반(反)인권적인 동독 정부의 생명을 연장해준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동서독 인적 교류를 확대해 양측에서 수백만 명이 상대 지역을 방문하게 돼 상호 이해의 기반을 닦았다.
이진 훔볼트대 박사는 "진보적인 사회민주당이 동독과의 화해뿐만이 아니라 동독인권기록소 설치·유지 등 동독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보수적인 기독민주·기독사회당은 정권탈환 후 대동독 경제 지원에 대해 종종 더욱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다"면서 "이를 거울삼아 우리 사회에도 팽배한 진영논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당시 서독이 대동독 지원 속에서 일대일 상호주의는 아니더라도 편익을 취했지만, 지원과 대가의 규모를 볼 때 일방적인 지원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1984년 8월 당시 연합뉴스 특파원은 서독의 수도 본에서 작성한 동서독 교류·협력과 관련한 기사 말미에서 "일방적인 것으로 보이는 동서독 간의 경제교류는 아직은 어렵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서독 정부와 국민들의 가슴 아픈 노력인 것이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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