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의 해부]①배철현 前 서울대교수『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
영문 책들과 상당부분 일치…문장 단위까지 1대 1 대응 많아
베끼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의심되는 오류들도 발견
※ 편집자주 = 활발한 대중 강연, 저술 활동, 언론 기고, TV 출연 등으로 한국 인문학계의 '슈퍼스타'가 된 배철현 전(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에 대해 작년 12월 초에 표절 의혹이 처음 제기됐습니다. 배 전 교수는 의혹이 제기된지 약 1개월만에 서울대에 사직서를 제출했으며, 서울대는 지난 9일 사표를 수리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서울대의 사직서 수리는 표절 의혹에 대한 조사 없이 이뤄진 것이어서 '면죄부 주기'라는 비판도 일고 있습니다.
연합뉴스 탐사보도팀은 의혹을 처음 제기한 페이스북 커뮤니티 '신학서적 표절반대'의 운영자인 이성하 원주 가현침례교회 목사와 저작권 에이전시 '알맹2'의 맹호성 이사 등의 제보를 받아 진행해 온 자체 확인작업과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시리즈 기사 4건을 준비했습니다.
(서울=연합뉴스) 탐사보도팀 임화섭 오예진 김예나 기자 = 배철현 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한국 인문학계의 슈퍼스타다.
특정 종교가 강요하는 편협한 근본주의적 믿음에서 탈피해 인간 본연의 영성을 찾도록 영감을 주는 그의 책과 강연은 세상살이에 지쳐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희구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감리교 목사의 아들인 그는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고대근동학과에서 200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박사학위 취득 후 가톨릭 계열의 성서연구소인 사단법인 한님성서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재직하다가 2002년 세종대 교양학부 조교수로 임용됐으며 2003년에는 서울대 인문대 종교학과로 옮겼다. 개신교 목사 안수도 받아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목사로도 2017년까지 등록돼 있었으나 지금은 '퇴회' 처리된 상태다.
연합뉴스 탐사보도팀은 이런 화려한 경력을 가진 배 전 교수가 연구 실적으로 표시한 책들과 논문들 중 일부를 작년 12월부터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
13일 서울대 인문대 홈페이지의 배철현 교수 소개(아직 현직으로 나와 있음)의 '연구' 부분에는 단행본 저서(공저 포함) 20권, 역서 3권, 논문 27편이 실려 있다.
'저서' 20권 중 '공저'로 표시된 것은 6권이었으며, 이것 외에 실제로는 공저인데도 홈페이지에는 공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책도 있었다. 『종교란 무엇입니까?』(분도출판사, 2002)가 그 예다.
배 전 교수의 단독 저서 중 대부분은 일반 대중을 위한 에세이집, 교양도서, 어린이용 도서 등이었으며, 독창적 학술 연구서는 단 한 권뿐이었다.
◇ 유일한 단독 연구서 『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
배 전 교수가 세종대와 서울대에 임용된 것이 각각 2002년과 2003년임을 감안하면, 서울대 인문대 홈페이지에 실린 연구실적 기준으로 임용 시점 전에 단독으로 집필한 학술 연구서는 『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단 하나밖에 없었다.
배 전 교수 저서 중 이와 동시에 발간된 『유다인의 토라 -- 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도 있으나, 별도 연구서가 아니라『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 중 전문적 내용을 삭제해 일반인용 대중서로 만든 것이다.
배 전 교수 소개 페이지에는 『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가 2002년에 나온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연합뉴스 탐사보도팀이 책 실물을 확인한 결과 실제로는 이 책의 제1판 제1쇄는 2001년에, 제1판 제2쇄는 2005년에 각각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한님성서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할 때 출간한 이 책의 머리말에서 배 전 교수는 "이 『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 역주는 지난 이천 년동안 시도된, 서양의 해석 전통을 곧바로 한국의 신학 전통으로 삼아온 학문적 사대주의에서 벗어나는 작업의 시작인 동시에, 이 땅에 그리스도교 전통의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는 작업의 시작이다"라고 썼다.
서양 학자들이 해석해 놓은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입하지 않고, 한국인 학자의 독창적 시각으로 역주와 해설을 달겠다는 포부가 담긴 선언이었다.
그러나 연합뉴스가 이 책의 세부 내용을 그 전에 출간된 영어 책들과 비교해 본 결과, 배 전 교수가 이런 포부에 걸맞게 역주를 집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독창적인 내용이 거의 없었을뿐만 아니라, 영문 책을 베낀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도 많이 발견됐다.
배 전 교수의 책 중 머리말, 추천사, 일러두기, 참고문헌 등을 제외한 주요 부분은 '서론'(pp.29-73), '장별해제'(pp.77-112), '아람어 본문과 우리말 본문·각주'(pp.114-409), '본문비평각주'(pp.413-443)으로 나뉜다.
◇ 장별해제 대부분 '발췌 표절' 의심
배 교수는 이 책 머리말에서 "장별해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창세기와 고대 근동의 유사한 문헌을 비교하고 해설하는 자리이다. 이 장별해제의 주제들 가운데 몇몇은 유다출판협회(Jewish Publication Society)에서 출판된 『모세오경 주석서』(Torah Commentary) 중 사르나(Nahum H. Sarna)의 주석과 부록(Excurse, 375-411쪽)의 주제를 따랐다"고 썼다. 이 중 "Nahum. H."는 "Nahum M."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잘못 옮긴 것으로 보인다.
배 전 교수는 또 "그로스펠트(B. Grossfeld)와 아버바흐(M. Aberbach)의 『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The Targum Onkelos to Genesis, Ktav Publishing House: Denver, 1982) 각주를 비교·참조하였다. 인명과 지명에 대한 어원 설명은 역주자가 붙였다"고도 설명했다.
그는 "장별해제의 주제들 가운데 몇몇은…의 주제를 따랐다", "각주를 비교·참조하였다"는 표현을 썼으나, 내용과 단락은 물론이고 문장과 표현까지 일치하는 부분이 매우 많았다.
그는 "서론의 '타르굼의 종류'는 Anchor Bible Dictionary에서 간추렸다"고 썼으나, 실제로는 '타르굼의 종류' 부분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부분이 앵커 바이블, 그로스펠트와 아버바흐의 주석, 사르나의 주석서 등과 일치했다.
배 교수 책 중 '장별해제' 부분은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내용 대부분이 사르나의 주석서 등에서 따 온 것이었으며, 많은 경우 문장 단위까지 '1대 1 대응'이 가능했다. 그렇지 않은 일부분도 대개는 간단한 어근 해설 등 사전에 나오는 내용이었으며, 배 교수 본인의 독창적 견해가 담긴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별로 없었다.
영문 책들 중 번역이 까다로운 부분은 건너뛰고 일부 내용을 생략하고 베끼는 '발췌 표절'이 의심되는 대목이었다.
예를 들어 배 교수 책 중 pp.93-94의 '바벨탑 이야기(11,1-9)'는 2페이지에 걸친 모든 문장이 사르나 주석서와 일치했다.
사르나 주석서에 뜻과 발음이 설명된 단어들을 어근으로 쪼개서 표시하기 위해 문장 가운데 나오는 일부 단어 끝에 괄호가 달리고 알파벳 10여자가 삽입되었을 뿐이다.
◇ 엉뚱한 실수들…'베끼는 과정에서 생긴 사고' 의심
배 전 교수 책에서는 복사 과정에서 생긴 사고라고 가정하면 설명하기 쉬운 오류가 여럿 발견됐다.
특히 스캐너로 책을 읽어들인 뒤 이를 글자로 바꾸는 광학적 문자 판독(OCR) 기기를 이용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품을만한 대목들이 있다.
배 전 교수의 머리말(p.10)에서 'Nahum. H.'가 되어야 할 부분이 'Nahum M.'로 적혀 있는 것이 그런 예다. 'H'와 'M'이 혼동되는 현상은 OCR에서 흔하다.
앞에서 예로 든 '바벨탑 이야기(11,1-9)'에도 OCR 기기에서 종종 발생하는 부류의 오류가 있다.
배 전 교수 책의 p.93에는 "역청은 바빌론에서 1225km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가에 위치한 히트(Hit)에서 많이 나왔다"는 부분이 있다. 맥락으로 보아 이 부분은 '1225km'가 아니라 '225km'가 되어야 옳다.
이 부분의 '표절 원본'으로 추정되는 사르나 주석서의 p.83에는 이에 해당하는 부분이 '140 miles (225km.)'로 올바르게 나와 있다.
컴퓨터 자판에서는 '(' 키는 자판의 오른쪽에, '1' 키는 자판의 왼쪽에 달려 있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혼동의 여지가 없다. 즉 타이핑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과 '1'의 모양이 비슷해 혼동되는 현상은 OCR 스캔 과정에서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카피 앤드 페이스트'로 인해 발생한 오류로 의심할만한 정황이 또 있다.
배 교수 책의 '비평각주' 부분 p.441에 나오는 창세기 제46장 제22절 비평각주는 엉뚱하게 세 행에 걸쳐 쪼개져 뒤죽박죽이 됐다.
이는 이웃한 위치에 놓인 제9절 각주의 줄바꿈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추정된다. 배 교수는 '한국어판'인 이 책을 내면서 비평각주에 포함된 영어 문장까지 그대로 가져 왔다. 비평각주는 기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며, 문장은 드물게야 나오기 때문에 영어 문장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그대로 가져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오류는 비평각주를 본문과 대조해서 읽고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면 발생하기 어렵지만, 기계적으로 '카피 앤드 페이스트'를 했다면 아주 쉽게 발생할 수 있는 사고다.
히브리어나 아람어는 가로쓰기라도 오른쪽→왼쪽으로 읽어야 하며, 영문이나 한글은 왼쪽→오른쪽으로 읽어야 하므로, 이 두 가지를 혼합해서 쓸 때는 무심코 '카피 앤드 페이스트'를 했다가 컴퓨터에서 줄바꿈이 엉뚱하게 되어 버리는 사고가 흔하다.
배 교수 책 중 아람어 텍스트의 저본은 스퍼버(Alexander Sperber)의 『The Bible in Aramaic: The Pentateuch According to Targum Onquelos, Vol. I』(1959년 출간)다.
스퍼버 책의 비평각주는 본문이 실린 페이지의 하단에 '각주'로 달려 있으나, 배 교수 책의 '비평각주'는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본문에 각주(footnotes) 형식으로 달려 있지 않고 책 뒷부분에 한데 모은 미주(endnotes) 형태로 되어 있다. 게다가 스퍼버 책은 전체적으로 오른쪽→왼쪽으로 제본되어 있으나, 배 교수 책은 전체적으로 왼쪽→오른쪽으로 제본되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사고 발생 소지가 더욱 컸던 것으로 보인다.
◇ '절판인듯 절판 아닌 절판 같은' 품절
이 책은 13일 현재 주요 인터넷 서점들에서 '품절'로 표시되어 있다. 다만 공식적으로 절판 상태는 아니다.
연합뉴스는 대학과 연구소 등 도서관을 통해 배 교수 책의 제1쇄(2001년)와 제2쇄(2005년)를 확보했으며, 시중에서 구입이 가능한지 여부를 점검하기 위해 지난 8일 모 인터넷 서점을 통해 주문을 넣어 보았다.
이 인터넷 서점에는 원래 이 책이 '주문가능'이라고 표시되어 있었고 온라인 주문까지 문제 없이 이뤄졌으나, 이틀 뒤인 10일에 서점 측으로부터 "출판사에 연락했더니 재고가 없다고 한다"는 취지의 연락이 왔다.
『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를 구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한님성서연구소 관계자는 "재고가 없다"고 말했으며, 가톨릭출판사 측은 "상품 정보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다만 이 책의 일반인용 축약 버전인 『유다인의 토라 -- 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는 12일 기준으로 주요 인터넷 서점들에서 여전히 주문이 가능한 상태였다. 지난주까지도 실제로 주문하면 상품이 도착했다.
표절 의혹이 매우 짙은 책이 여전히 팔리고 있는 것이다.
solatido@yna.co.kr
ohyes@yna.co.kr
yes@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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