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3)불변의 헌법1조 '민주공화제' 선포
일제ㆍ군주정과 결별…상하이·러시아·한성정부 1919년 9월 통합해 26년 지속
'독립운동단체 불과' 비판론도…"존재ㆍ역할 가치 종합적 고려해야"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현행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이라는 국명,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정체와 국체는 이후 역대 임정헌법 및 제헌헌법의 바탕이 됐고, 지금까지도 우리 헌법의 근간이다.
조소앙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독립국이자, '조선'이라는 전제군주제와 결별한 민주 공화정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우리 역사의 기념비적 사건이다. 이는 3·1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출현함으로써 가능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엮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 따르면 임시정부 수립 이전에도 해외에서는 대한제국 소멸을 망국(亡國)이 아닌 새로운 국가 건설의 계기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미주에서 활동한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10월 가정부 설립을 제창했고, 상하이에 머물던 독립운동가들은 1917년 대한제국의 국민·영토·주권을 상속할 최고기관 설립을 제안한 '대동단결선언'을 작성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인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책 '한국 독립운동사 강의'에서 "3·1운동이 전개되던 1919년 3월과 4월에 국내외에서 정부 조직 8개가 선언됐다"며 "실제적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노령(러시아)·상하이·한성 임시정부였다"고 밝혔다.
상하이에서는 청년 항일운동 단체인 신한청년당 인사와 민족대표 33인의 위임을 받은 현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최고기관 설립을 논의했고, 4월 10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한 뒤 이튿날 10조로 이뤄진 임시헌장을 공포했다. 정치체제는 내각책임제로 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했다.
러시아 한인 운동가들은 이에 앞서 3월 17일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임시정부 성격을 띤 대한국민회의로 개편했고, 한성에서는 4월 23일 13도 대표자들이 국민대회 형식을 빌려 임시정부 수립을 발표했다.
이처럼 중국, 러시아, 한성에서 각각 출범한 임시정부는 5개월 후인 그해 9월에 통합을 이뤘다. 합의안은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되 정부 위치는 상하이에 둔다는 것이 골자였다.
장규식 중앙대 교수는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서 "11월 3일 이동휘가 우여곡절 끝에 국무총리에 취임하면서 임시정부는 부족하나마 통합정부로서의 모습을 갖췄고, 최초의 좌우합작정부라는 의미도 지니게 됐다"고 평가했다.
임시정부는 설립 초기에 내무부와 교통부 산하에 각각 연통부(聯通府)와 교통국을 만들어 국내 행정을 장악하고 정보와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다. 또 미국·중국·소련을 상대로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활약은 오래가지 않았다. 설립 당시 미국에 위임통치를 제안했다는 이유로 이승만의 국무총리 선출을 반대한 신채호는 박용만, 신숙 등과 함께 임시정부에 반기를 들었고, 노선과 출신 지역에 따른 내부 갈등도 심화했다.
게다가 연통부와 교통국이 유지한 국내 연결망이 끊어지고, 지원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내우외환의 처지에 놓였다.
이에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개혁하자는 개조파와 신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가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열었으나 성과 없이 끝났고, 이후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자는 유일당 운동과 의열투쟁을 벌였다.
임시정부는 1932년부터 항저우(杭州),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등지를 돌다 1940년 내륙 도시인 충칭(重慶)에 터전을 잡았고, 광복군을 창설해 본토에 진입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임시정부 고문으로 활동한 김가진의 손자인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은 회고록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에서 임시정부 의의에 대해 "상하이에서, 만주 벌판에서, 연해주에서, 지구촌 곳곳에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독립된 내 조국을 염원하며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다"고 강조했다.
임시정부는 해외에서 독립운동 구심점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한계를 노출하기도 했다. 외국 정세에 따라 행동반경이 축소되기도 했고, 정부라는 명칭에 걸맞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 시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역사발전 주체를 민중으로 보는 민중사관이 퍼진 1980년대 전후에는 임시정부와 3·1운동 사이에 연결고리가 약했으며, 임시정부는 민족 해방운동을 주도하지 못한 일개 독립운동 단체에 불과했다는 비판적 견해가 힘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지향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재조명되면서 2000년대 이후 부정적 평가는 크게 줄어들었다.
다만 다양한 지역에서 태동한 임시정부 뿌리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만 찾으려는 시각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는 학자도 있다.
정부가 일부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수용해 내년부터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에서 4월 11일로 변경했는데, 이보다는 임시정부가 명실상부한 통합을 이뤄낸 1919년 9월 이후 특정일을 기념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희곤 교수는 임시정부에 대한 극단적 찬양이나 비난을 거부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는 존재가치와 역할가치로 구분해야 한다"면서 "26년이란 존립 기간에 구심점 역할을 계속하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활동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임시정부의 역할가치는 시기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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