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외주화] ① 비정규직 벼랑끝으로 내모는 원·하청 구조
발전5사 산재 97%가 하청노동자…외환위기후 비용절감·위험회피 목적으로 확산
"노동자 산재에 대한 원청 책임 강화 필요…정규직화도 속도 내야"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홀로 밤샘 근무 중 참변을 당한 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김용균 씨의 추모를 위해 최근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분향소에는 그의 영정 사진이 놓여있다.
사진 속 김 씨는 작업 헬멧과 마스크를 쓴 채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그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촉구하는 운동에 참여하며 찍은 인증사진이다.
김 씨의 사망사고는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위험으로 내모는 원·하청 구조를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경종을 우리 사회에 울렸다.
김 씨는 한국서부발전의 하청 업체 한국발전기술 컨베이어 운전원으로, 서부발전이 운영하는 태안 발전소 9·10호기 컨베이어벨트 관리 업무를 했다. 하청 노동자가 원청 사업장에서 공정의 일부를 담당한 것으로, 사내하도급에 해당한다.
김 씨의 사망사고는 하청 노동자에 대한 안전보건 관리가 얼마나 소홀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고 당시 2인 1조 근무 수칙이 지켜지지 않아 김 씨는 홀로 일해야 했고 컨베이어벨트에 몸이 끼었을 때 비상정지 스위치(풀 코드)를 작동시켜줄 동료도 없었다. 인건비 절감을 추구한 업체가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소홀히 한 것이다.
입사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김 씨는 위험한 밤샘 근무를 혼자 했다. 태안 발전소에서는 노동자 안전교육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경찰 조사에서 확인됐다.
위험 업무를 하는 하청 노동자는 대부분 김 씨와 비슷한 처지다. 하청 노동자의 산업재해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위험의 외주화'를 넘어 '죽음의 외주화'라는 말까지 나왔다.
서부발전을 포함한 발전 공기업도 산재가 하청 노동자에게 집중되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에 따르면 2012∼2016년 5년 동안 발전 5개 기업에서 발생한 산재는 모두 346건이고 이 중 하청 노동자가 당한 것은 337건으로 전체의 97.4%을 차지했다.
조선업과 건설업은 위험의 외주화가 가장 심한 업종으로 꼽힌다.
조선업 대형 사고를 조사한 '조선업 중대 산업재해 국민 참여 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부터 작년 9월까지 약 10년 동안 조선업의 산재 사망자는 모두 324명이고 이 중 하청 노동자가 257명(79.3%)에 달했다.
작년 5월 경남 거제 삼성중공업 조선소에서 크레인 충돌사고로 숨진 노동자 6명도 모두 하청 업체 소속이었다.
하청 노동자가 산재 위험에 노출되는 원인은 원·하청 구조 자체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원청이 산재 책임을 피하기 위해 위험한 업무를 외주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청 업체는 설비투자 능력이 부족한 데다 원청으로부터 업무 기간 단축 압력을 받아 기본적으로 안전한 작업 환경을 만들기 어렵다.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하청 노동자의 잦은 이직으로 근속 기간이 짧아 업무 적응도가 떨어지는 점도 산재 위험을 높인다.
하청 업체는 노무관리 수준도 낮아 안전보건 시스템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곳이 많다.
하청 업체가 업무의 일부를 다시 외주화하기도 한다. 이렇게 중층적인 원·하청 구조가 만들어지면 원·하청의 소통이 어려워져 안전보건 시스템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 하청 노동자는 업무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알기 어려워 원청과 정보공유를 포함한 소통이 중요하다.
기업이 업무를 외주화하는 것은 경영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인력 운용의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의 경우 정규직을 뽑아 일을 시키는 것보다는 하청 업체와 계약을 맺고 일정 기간 맡기는 게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하청 업체의 수주 경쟁을 유도해 단가를 낮출 수도 있다.
위험 업무의 경우 노동자 산재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 외주화의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위험 업무를 둘러싼 정규직 노조와의 갈등을 피할 수 있다는 것도 사업주에게는 장점이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상 하청 노동자 산재에 대한 원청 사업주에 대한 처벌은 너무 가볍다는 지적을 받는다.
국내 주요 산재 사망사고에서 원청 임직원은 수백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거나 징역형을 선고받더라도 집행유예인 경우가 많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원청 사업주의 책임을 대폭 강화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여야가 연내 처리에 합의했지만 여전히 쟁점에 대한 의견차가 커 격론이 계속되고 있다.
원·하청 관계가 한국에 특수한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확산하면서 고용 유연화를 위한 기업의 '아웃소싱'이 확산했다.
국내에서는 1990년대 말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 이후 빠르게 퍼져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서부발전과 같은 공기업도 공공성보다는 경제성을 우선시하면서 원·하청 구조를 앞다퉈 도입했다는 게 노동계의 지적이다.
제2의 김용균 씨 사망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원·하청 구조를 활용한 위험의 외주화를 막는 게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원·하청 구조는 경기 변동에 따른 고용 유연화가 필수적인 업무에 대해서만 인정하고 비용 절감과 책임 회피를 위한 것은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작년 5월 취임 직후 '비정규직 제로' 선언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정부가 추진 중인 공공부문 정규직화는 여러 곳에서 잡음이 일고 있다.
하청 노동자를 포함한 파견·용역의 경우 협력업체와 정규직 노동자를 포함한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리다. 노동계는 자회사를 활용한 정규직 전환 방식에도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하청 업체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노동계 관계자는 "과잉 경쟁으로 낮은 단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하청 업체의 적정 이익을 보장함으로써 안전보건 역량을 갖춘 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힘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ljglory@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