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남도의 겨울…반도의 끝에서 한 해의 길을 찾다
여수 여자만
(여수=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지난겨울의 혹독했던 추위는 다시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겨울에도 붉은 꽃이 피고 지는 곳, 들판에서는 보리와 월동 배추, 파, 마늘, 양파가 여전히 푸르게 자라는 곳, 때로 거센 바닷바람에 옷깃을 여미다가도 바람이 잦아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두꺼운 외투가 거추장스러워지는 곳, 남도로 가보자.
물 아래 갯벌도 아름답다
물이 아름다운 곳 여수(麗水). 그곳은 도심의 불빛이 반짝이는 밤바다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물 아래마저 아름답다.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이 들고 나며 귀중한 생명을 품은 갯벌이 그 말간 얼굴을 드러내는 여수의 서쪽 바다, 여자만(汝自灣)이다.
12월 초의 어느 날 서울에서는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길, 라디오에서는 한파주의보를 알리며 퇴근길 따뜻한 옷을 준비하라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부연 안개를 뚫고 달려 전라남도에 닿으니 해가 비치기 시작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에 들어서 차창을 열었다. 뺨을 스치는 햇살과 바람이 봄의 것인 양 따사롭고 부드럽다. 순천만과 여자만이 이어지는 곳에 있는 와온 해변에 잠시 멈췄다. 기온을 확인하니 영상 17도. 갑자기 거세게 불기 시작한 바람에 놀랐지만, 그 바람마저도 날카롭지는 않았다.
비린내 하나 나지 않는 신선한 바다 내음을 힘껏, 있는 힘껏 들이마셨다.
갯둠벙에서 맛본 짭조름하고 향긋한 자연산 굴
순천만 습지부터 와온 해변이 있는 순천시 해룡면까지 바다는 순천만이라 하고, 여수시 율촌면부터 아래로는 여자만이다.
여자만 한 가운데 있는 섬이 '너 여'(汝) 자의 형상을 닮은 데다, 육지와 멀어 모든 것을 스스로(自) 해결해야 한다는 뜻의 여자도다. 섬이 낮아 파도가 산을 넘는다 하여 '넘자도'라고 하던 것을 한자를 빌려 쓴 것이라고도 한다.
여수반도와 고흥반도로 둘러싸인 여자만의 맑고 깨끗한 바다에서는 꼬막, 굴, 바지락을 비롯한 질 좋은 해산물이 많이 난다.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오후, 종일 갯벌에 쪼그리고 앉아 굴을 캤을 주민들도 일을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마을과 가까운 갯벌의 끝에는 만조 때 들어온 바닷물을 가둬놓는 웅덩이인 갯둠벙이 있다. 여기서 막 따 온 굴과 작업 도구를 헹궈 개흙을 떨어낸다. 커다란 물통에 갯둠벙의 물을 담아가는 주민들이 많기에 이유를 물으니, 김장 배추를 이 바닷물로 절인단다.
사실 처음엔 갯둠벙이 뭔지도 모른 채, 갯둠벙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이게(갯둠벙) 뭐냐고 묻자 "갯둠벙!" 하시고는, 그 말을 못 알아듣고 난처해하는 객에게 "하나 먹어볼텨?"라며 막 헹궈낸 자연산 굴 한 점을 내미신다.
냉큼 받아 입에 넣으니 짭조름하고 향긋한 바다가 입안에 가득 퍼졌다. 감격에 겨워하는 것을 눈치채셨는지 "나도 딸이 넷이여"하며 이번에는 한 움큼을 덜어 내미신다. 입으로는 "아니 이 귀한 걸, 괜찮습니다" 하면서도 손바닥은 이미 자연산 굴을 맞으러 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운동화 밑이 찰박찰박할 정도로 물이 차올랐다. 넙죽넙죽 받아먹고 넙죽넙죽 인사를 한 다음 돌아 나오는데, 입안에는 여전히 바다 내음이 맴돌고 히죽히죽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햇빛에 물든 바다에 취해 바다의 소리를 듣는 곳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사곡리 해안도로 '갯노을길'을 따라 위쪽으로 걸었다.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기에도, 잘 정비된 자전거 도로를 달리기에도 좋지만, 하염없이 걷기에도 그만이다. 도로를 벗어나 갯벌 위로 만들어진 데크 다리를 따라 산책하는 주민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윗마을까지 가닿았다.
파랗기만 하던 하늘에 어느새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해가 한뼘씩 한뼘씩 낮아지면서 햇빛과 구름과 공기가 하늘과 바다 위에 그리는 그림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사진첩에 모아놓고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없게 비슷비슷한데도, 맨눈으로 보는 풍경은 어느 한순간도 놓치기가 아까웠다. 걷다 멈춰 노을을 향해 휴대전화를 들기를 반복하다가 어느덧 그마저도 관뒀다.
바다를 향해 가만히 섰다. 바다가 밀려오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여수의 동쪽 바다가 밤바다 위에 반짝이는 도심의 불빛에 취해 '여수 밤바다'를 흥얼댈 수밖에 없는 곳이라면, 여기 여자만은 햇빛에 물든 바다와 하늘빛에 취해 바다의 소리를 듣는 곳이다.
가사리 갈대밭부터 소뎅이 꼬막산까지
여자만의 자전거길은 오동도에서 시작해 시청을 지나 가사리 방조제를 거쳐 사곡리 해안을 따라 꼬막 선별장이 있는 율촌면 봉전리 소뎅이 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총 41㎞가 넘는 코스로, 초·중반에는 도심의 주요 관광지를 거친다.
라이딩족이 아니고, 여자만의 운치만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가사리 생태공원에서 시작하면 된다. 인근 YMCA생태교육관에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 방조제 안쪽으로 갈대밭이 펼쳐져 있는데 갈대 사이로 데크가 설치돼 있어 산책하기에도, 사진을 남기기에도 좋다. 이곳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들도 볼 수 있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큰고니 가족들이 풀이 우거진 곳에서 쉬고 있었다. 다 자란 큰고니는 흰색이지만, 아직 어린 아기 새는 어두운 잿빛이다.
민대기 문화관광해설사는 "순천만 갈대숲이 훨씬 크지만, 그래서 망원경이 있어야 새를 볼 수 있다"며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맨눈으로 새를 관찰하기에는 여기가 훨씬 좋다"고 자랑했다.
방조제 위에 올라서면 앞으로는 망망한 여자만의 바다가, 뒤로는 갈대숲 넘어 너른 평야가 펼쳐진다. 일제 강점기 쌀 공출을 위해 바다를 막아 만든 논이다.
평일인데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주말이면 라이딩족이 행렬을 이룬다고 한다. 날씨가 따뜻하다 보니 한겨울도 예외가 아니다.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곳곳에서 차를 멈춰 세우게 된다. 철 모르고 일찍 피어버린 길가의 동백꽃이 예뻐서, 물이 빠지고 드러난 갯벌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눈부셔서, 까만 갯벌 한가운데 우아하게 서 있는 새하얀 백로 때문에, 바다 건너 보이는 고흥 땅의 팔영산 봉우리를 헤아리느라.
이리저리 한눈을 팔며 걷다 보니 어느새 땀이 난다. 이날은 전라북도까지도 한파주의보가 내렸고, 여수도 전날보다 기온이 10도나 떨어졌지만, 여전히 영상 7도. 민 해설사는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별로 없으니 여기 사람들은 영하 3도만 되도 '허벌나게 춥다'고 한다"고 했다.
'꼬막 한 점에 소주 한 잔'
내친김에 사곡리 일대의 갯벌노을마을을 벗어나 순천시와 경계를 맞댄 율촌면 봉전리, 소뎅이 마을까지 달렸다. 소뎅이(솥뚜껑의 전남 방언)를 닮은 바위가 있는 이 마을에는 꼬막산도 있다.
바다를 점점이 채우고 있는 배들이 꼬막 선박들이다. 바다에서 채취한 꼬막을 선착장으로 옮겨오면 선착장에서 자동화 설비를 이용해 바로 꼬막을 선별하고 세척하는데, 속이 비거나 무게가 미달하는 꼬막이 육지 쪽에 쌓여 산을 이뤘다.
'벌교 꼬막'으로 유명한 참꼬막은 제사상에 올리는 귀한 꼬막이다. 갯벌에서 뻘배를 타고 사람이 직접 캐야 해서 생산량이 많지는 않은 데다, 최근 환경 변화 등 여러 요인으로 생산량이 더욱 줄어 맛보기 쉽지 않다.
여수에서 배로 캐는 꼬막은 새꼬막이다. 참꼬막은 껍데기의 골이 깊고 그 수도 적다. 새꼬막은 골이 상대적으로 얕고 그 수가 많다. 피꼬막은 참꼬막이나 새꼬막보다 훨씬 크다.
천지가 꼬막인 여기까지 와서 맛도 안 보고 갈 수는 없는 일. 제철인 꼬막은 입이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살짝 데쳐 나온다. 뒷부분 홈에 숟가락을 넣고 살짝 비틀면 쉽게 벌어진다.
막 데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꼬막을 아무런 양념 없이 그냥 먹는다. 향긋하고 졸깃한 것이 촉촉하고 부드럽다. '꼬막 한 점에 소주 한 잔'이라는 이 동네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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