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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형무소 4·3수형희생자 진상규명사업 진행해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실태조사 보고회 개최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제주4·3과 한국전쟁 당시 목포형무소에서 희생된 제주도민에 대한 진상규명사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이하 도민연대)는 6일 오후 제주시 하니크라운 호텔에서 '제주4·3 목포형무소 수형희생자 실태조사 보고회'를 열었다.
도민연대는 전주와 인천 형무소에 수감된 제주4·3 수형희생자에 대한 실태조사 보고에 이어 목포형무소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목포형무소에는 4·3사건의 단초가 된 1947년 3·1 총격 사건과 이듬해 발발한 4·3사건 등으로 인해 많은 제주도민이 수감돼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14일 목포형무소 탈옥사건이 발생하면서 많은 도민이 희생됐다.
당시 형무소 수용정원은 600명이었으나 수용된 인원은 두배가 넘는 1천421명이었다. 초과수용으로 인해 급식과 의약품은 물론 몸을 대고 누울 공간조차 부족할 정도로 열악했던 수형환경이 사건의 원인이었다.
1949년 9월 23일 목포경찰서에서 발표한 진압결과 내용을 보면 탈옥수는 413명으로 이 중 298명이 사살, 나머지는 체포·미체포됐거나 자수한 것으로 조사됐다.
탈옥사건 직전 일반재판과 군사재판 등으로 수감돼 있던 제주도민 600명 중 탈옥에 가담한 인원은 52명(일반재판 26명·군사재판 26명)이었다.

도민연대는 보고서를 통해 "탈옥상황을 지켜본 제주출신 재소자들은 사건 이후 작업장에서 봤던 지인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증언하고 있어 당시 희생된 제주도민은 52명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고 봤다.
목포형무소 4·3 재소자들은 이듬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또다시 희생됐다.
헌병사령관 송요찬이 "광주, 전주, 목포 형무소에 재감 중인 죄수 및 보도연맹 관계자 기타 피검자를 즉결처분하라"고 광주헌병대장에게 지시했기 때문이다.
도민연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출소하거나 사형에 처한 재소자를 제외하면, 한국전쟁 당시 목포형무소에 남아 있던 제주출신 수감자는 400명에 이르지만 아직 행방을 알 수 없고,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더 늦기 전에 국가기록원, 목포형무소 소장 자료 등 탈옥수 공식명단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며, 4·3 당시 목포형무소 수감희생자에 대한 진상규명사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보고회에서는 제주4·3을 진압하기 위한 출병 지시를 거부한 여수 주둔 14연대의 항쟁에 대해 주철희 박사의 주제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bjc@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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