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시민권 신청하는 히스패닉계 미국인 증가
차별 정책 피해 유럽행 교두보 마련?…트럼프 당선후 급증
(서울=연합뉴스) 정성호 기자 =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인이나 히스패닉에 대해 나쁘게 말할 때면 정말 속이 뒤집힙니다. 이곳 사람들은 그가 범죄자나 불법 이민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녜요. 그는 우리 모두에 관해 얘기하는 겁니다. 그는 멕시코 사람, 그리고 모든 남미 사람들을 미워해요."
영국 일간 가디언은 26일(현지시간) 미국 뉴멕시코의 역사학자인 로브 마르티네스의 이 같은 발언을 인용하며 "마르티네스와 같은 미국 히스패닉들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디언은 "마르티네스는 가족의 유럽 혈통을 자신들의 미래를 담보할 수단으로 바라보는 미국인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스페인 시민권을 신청하는 '세파르디 유대인'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세파르디 유대인은 스페인과 북아프리카계 유대인으로, 1492년 스페인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는 국왕 칙령에 따라 강제로 개종하거나 화형대에 매달려졌다. 어느 선택지도 받아들일 수 없던 이들은 고향을 등지고 외국으로 떠나야 했다.
스페인 정부는 2015년 10월 이들 세파르디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스페인은 '역사의 과오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부유한 유대인의 투자를 끌어들이려는 조치라는 해석도 나왔다.
제도 시행 이후에도 신청자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가디언은 보도했다.
뉴멕시코 유대인연맹의 세라 코플릭 지역사회 지원 활동 책임자는 "2016년 11월의 선거가 분수령이었다"며 "선거 전 우리가 발급한 세파르디 유대인 증명서는 20∼30장에 그쳤지만 이제는 발급한 증명서가 1천500장을 헤아린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마르티네스 역시 최근 스페인 시민권을 얻기 위한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가디언은 2016년 트럼프 당선 직후 '상황이 악화됐다'고 답한 라틴계 미국인이 32%에 그쳤으나 지난달에는 49%까지 올라갔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며 "마르티네스는 스페인 시민권이란 보험에 들고 싶어하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 정부의 히스패닉계에 대한 차별과 반이민 정서가 더 악화할 경우 미국을 떠나 스페인에 정착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해두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물론 스페인 시민권 신청자들이 모두 미국인인 것도, 모두 두려움 때문에 시민권을 신청하는 것도 아니다.
역사학자이기도 한 코플릭 책임자는 "우리가 받은 신청서는 50개국 이상에서 온 것들"이라며 "물론 대부분은 미국과 멕시코, 베네수엘라 등 3개국에서 온다"고 말했다.
코플릭 책임자는 "우리는 유대인의 역사와 유대계 남미인들의 역사를 알고 있다"며 "이 둘의 역사에는 모두 '플랜B', 즉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여분의 선택지를 마련해두려는 본능이 있다"고 말했다.
sisyph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