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사랑' 머무는 고향…제주·대전서 부친 시집
현택훈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이정섭 '유령들의 저녁 식사'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나고 자란 고향에서 부지런히 시를 쓰며 지역 시단을 이끄는 시인들의 신작이 나란히 출간됐다. 도서출판 걷는사람 시인선 시리즈로 나온 현택훈(44) 시인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와 이정섭(48) 시인의 '유령들의 저녁 식사'.
제주에서 태어난 현택훈 시인은 2007년 '시와정신'으로 등단해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음악 산문집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를 펴냈으며, 현재 제주에서 시집 전문서점 '시옷서점'을 운영한다.
그는 지난해 만우절에 이 서점 문을 열었는데, 제주에서 처음 연 시집 전문서점이자 제주 토박이 시인이 고향에 서점을 열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서점에는 손님이 많지 않지만, 시에 관심 있는 청년들이 종종 찾아온다고 한다. 시가 돈이 되지 않듯, 작은 시집 서점도 돈이 되지 않지만, 시인은 이곳에 앉아 늘 시를 쓴다.
이런 그의 이야기는 지난해 9월 개봉한 영화 '시인의 사랑'에 주요 모티프로 쓰이기도 했다. 그가 가끔 버스를 타고 제주도를 빙빙 돌며 서정시를 쓰는 모습이 영화 안에 그려졌다. 영화 장례식장 장면에서는 시인이 엑스트라로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시인이 5년여 만에 펴내는 신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라는 제목을 통해 드러나듯 시인 자신이 떠나지 않고 머무는 일상의 공간과 고향 제주도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시집이다.
"물은 바다로 흘러가는데/길은 어디로 흘러갈까요/솜반천으로 가는 솜반천길/길도 물 따라 흘러/바다로 흘러가지요/아무리 힘들게/오르막길 오르더라도/결국엔 내리막길로 흘러가죠/솜반천길 걸으면/작은 교회/문 닫은 슈퍼/평수 넓지 않은 빌라/솜반천으로 흘러가네요" ('솜반천길' 부분)
4·3평화문학상을 받기도 한 시인은 제주의 아픈 역사를 응시하기도 한다.
"누굴까요 맹물을 타지 않은 진한 국물을 꽃물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며칠 굶어 데꾼한 얼굴의 사람들은 숨을 곳을 먼저 찾아야 했습니다 마을을 잃어버린 사람들 한데 모여 마을을 이뤘습니다 눈 내리면 눈밥을 먹으며 솔개그늘 아래 몸을 움츠렸습니다 하룻밤 죽지 않고 버티면 대신 누군가 죽는 밤 찬바람머리에 숨어들어온 사람들 봄 지나도 나가지 못하고 동백꽃 각혈하며 쓰러져간 사람들 사람들 꽃물 한 그릇 진설합니다/누굴까요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를 비꽃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우리말 사전' 전문)
대전이 고향인 이정섭 시인은 대전충남작가회의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한 이력이 있으며 지역 시단을 주도적으로 이끈다. 2005년 '문학마당'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2008년 시집 '유령들'을 내놨고, 이번 시집은 10년 만에 펴내는 신작이다.
시인은 우리가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모두 유령이 된다고 본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 앞에서는 무기력한 유령이 됨과 동시에 철저한 방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령들은 집착과 미련, 그리움, 원망 같은 감정들 때문에 과거를 떠나지 못하고 떠돌기도 한다.
"갓 데운 얼굴이 집단 서식하는 어떤 왕국에서는 털 고운 나를 손쉽게 양념해 내가 없는 내일 어디쯤 둘러앉아 예의 바르게 시식하고는 했다 한 여자는 내 눈동자로 엮은 목걸이를 팽개치고 떠나고 다른 여자는 식탁을 둘러싼 구약을 뒤져 나의 정체를 수소문했다" ('유령들의 저녁 식사' 부분)
시에 등장하는 여러 유령은 시적 자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생명체로도 보인다. 시인은 우리의 존재는 끊임없이 의심을 갈구하는 불확실성의 생명체임을 강조한다.
"긴 겨울 지나 나는,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겨울과 겨울 사이 잠깐 눈 붙인 여인숙에 미량의 체취, 남았을까요, 밑줄 긋던 밤 지나고, 또박또박 침 발라 헤아리던 봄날은 왔는데요, 자생하는 들꽃은 상징이라는 새빨간 거짓말, 봄볕은 사실 죄다 아스팔트에 꽂히는 걸요, 곰팡내 깊은 여인숙 담요 아래 버려두고 온 겨울은 아직 꼬물거리는데요, 이렇게 샛노란 꽃, 피워도 되는 건지" ('개나리가 묻다' 부분)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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