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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 열차서 태어난 고려인…"후손들이 한국 정체성 가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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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 열차서 태어난 고려인…"후손들이 한국 정체성 가지길"



(우수리스크=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1937년 9월부터 12월까지 20만명에 달하는 고려인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려 영문도 모르고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굶주림과 추위 속에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고려인들은 토굴을 파고 살아남아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고려인 홍 안톤 이바노비치(81) 씨는 1937년 강제이주 기차 안에서 태어난 슬픈 역사의 산증인이다.
지난 23일 우수리스크 미르교회에서 만난 그는 "창문도 없는 화차에 싣고 가서 아무것도 없는 갈대밭에 내려놨다고 한다"며 "대부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시켰는데 가는 길에 죽으면 다 버렸다"고 전했다.
당시 40여일간 중앙아시아로 가는 강제이주 길에서 약 2만명의 고려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홍 씨는 "부모님이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고 기억이 없다"면서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들에게 한민족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우리말도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말을 모른다"며 "아이들이 한국말을 모르기 때문에 러시아로 된 한국 역사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인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굶주림과 억압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하면서 고려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는 많은 독립지사가 망명하면서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그러나 스탈린 정권은 1937년 고려인을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보냈고,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야 고려인이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연해주로 돌아온 고려인들은 한국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지금 자라는 세대는 한글을 몰라 더더욱 한민족의 역사를 배울 길이 없는 게 현실이다.
김 엘라 시나예브나(73) 씨는 "일본이 과거 한국에서 한글을 못 쓰게 한 것처럼 스탈린 시대 소련에서도 우리말을 못 쓰게 했다"며 "스탈린이 죽은 이후로 한국말을 배웠지만 언어교육은 굉장히 미미했다"고 말했다.
그는 "후손들이 우리말을 잊어버렸으니 한국에서 고려인들을 위한 언어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줘 후손들이 한국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도록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역시 강제이주가 있었던 1937년 태어난 윤 스타니슬라브 그레고리예비치 씨는 "1954년에 3천명 정도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며 "슬픈 역사를 들으러 이곳까지 와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연해주에는 독립운동으로 알려진 인물들의 후손도 있지만 일제에 대항해 싸우던 이름 모를 영웅들의 자손도 많다.
윤 스타니슬라브 씨의 아버지 역시 만주에서 일본과 싸웠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남북통일과 평화도 기원했다.
그들도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아픈 역사를 딛고 희망의 역사를 써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최 나젤르다(83) 씨는 "남과 북의 경계가 빨리 허물어져서 남북이 오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엘라 씨도 "남쪽이나 북쪽이나 한민족 피를 받았으니 다 같이 잘사는 날이 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인 소강석 목사는 "독립운동의 후손들이 우리 언어와 역사를 잊어버리고, 우리가 찾아와 그 흔적을 찾는다는 게 비극"이라며 "우리 국민이 고려인들을 어떻게 섬기고 잃어버린 역사의식과 혼을 어떻게 회복시키며 민족 정체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가 과제"라고 말했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은 윤동주와 3.1운동 등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제작과 3.1운동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운동 등을 지원하고 있다.



doubl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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