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분간 이어진 커튼콜·앙코르만 8곡…키신에 열광한 밤
예브게니 키신 리사이틀 리뷰
(서울=연합뉴스) 최은규 객원기자 = 그는 건반의 주인이다. 그가 건반더러 뛰놀라 하면 건반은 춤추듯 뛰놀고 건반더러 노래하라고 하면 노래한다. 모든 것은 피아노 앞에 앉은 그의 손아귀 안에 있다. 그의 이름은 예브게니 키신. 그는 단연코 이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다.
지난 2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선 예브게니 키신은 앙코르 무대까지 포함한 3시간 25분 동안 국내 음악 팬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키신의 연주가 펼쳐지는 동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의 피아노 연주에 몰입하던 관객들은 본 공연이 다 끝난 후에도 무려 1시간 25분간 기립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고, 키신은 계속되는 커튼콜에 정중한 인사와 미소로 답하며 앙코르곡을 8곡이나 연주했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는 19세기 피아노 거장 프란츠 리스트의 열광적인 콘서트 무대에 비견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리스트의 피아노 공연 때처럼 여성 관객들이 무대 위로 꽃과 장신구들을 던지며 환호하고 기절하는 일은 없었지만, 키신의 앙코르 연주를 듣기 위해 집요하게 기립 박수를 계속하며 큰 소리로 '브라보!'를 외치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지르는 관객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클래식 공연장에서 흔히 보는 풍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키신이 선보인 피아노 연주를 들은 사람이라면 관객들의 이런 광적인 반응은 당연하다 느낄 것이다. 키신의 이번 리사이틀은 음악작품에 대한 이해를 넘어 마음속에 있는 음악적인 판타지를 피아노 소리로 완벽하게 구현해낸 놀라운 공연이었다.
연주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연주할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와 표현하고자 하는 소리가 있지만 그것을 실제 소리로 구현해내기 위해선 음표를 마음대로 다루는 기술적인 능력과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가 필요하다. 대개는 기술적인 문제로 좌절하거나 진실한 음악을 찾기 위한 의욕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쉼 없는 정진을 계속한 키신은 음악작품 성격에 따라 자유자재로 그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완전하게 구현해냈다.
비장한 발걸음과 같았던 쇼팽의 녹턴 f단조의 의미심장한 연주는 단지 앞으로 다가올 놀라운 연주에 대한 전주곡에 불과했다. 슈만의 피아노소나타 3번에서 키신은 마치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가며 세심하게 건물을 짓는 성실한 건축가 같았다. 슈만 특유의 격앙된 어조로 시작된 1악장에서 다양한 성격의 주제가 한데 어우러지더니 소나타 형식 구조물이 점차 그 화려한 위용을 드러냈다. 연주가 진행될수록 키신이 쌓아 올린 벽돌 하나하나는 크리스털처럼 아름답게 반짝였고, 클라라 슈만이 쓴 주제에 의한 변주 형식 3악장에선 음 하나하나가 노래하듯 부드러운 레가토로 이어지며 그가 지은 크리스털 궁전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슈만 소나타에서 마치 건축가가 된 듯 피아노 연주로서 작품 구조를 명확하게 선보인 키신은, 공연 후반부에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10곡에선 마치 회화작품 10점을 선보이듯 그림처럼 구체적이고 생생한 연주로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키신은 이번 공연에서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작품23의 1-7번과 작품32의 10, 12, 13번을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단숨에 연주해냈는데, 그 하나하나의 성격이 매우 또렷하게 흥미진진하게 표현되었기에 전주곡 10곡이 연주되는 시간 동안 그의 연주에 완전히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전주곡에 표제를 붙이지 않았지만, 키신의 연주로 듣는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은 구체적이고 확실한 이미지나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이를테면 작품 23의 제1번이 '애수' 혹은 '눈물'이라면 제2번은 '폭풍'과도 같았다. 음악작품에 대한 연주자 자신의 상상력과 확신이 매우 강하지 않고서는 단지 피아노 연주를 통해 이처럼 뚜렷한 메시지를 청중에게 전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키신은 이미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완전하게 체득하고 있었고, 그가 느끼는 음악을 피아노로 표현해내며 관객들의 영혼에 각인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본 공연 프로그램이 끝난 후 키신이 선보인 앙코르 무대는 그 자체로서 또 하나의 리사이틀이나 다름없었다. 무려 8곡이나 되는 앙코르를 연주한 후에도 계속되는 커튼콜에 끝까지 화답하며 무대에서 정중하게 인사하는 키신의 모습에서 피아노 연주뿐 아니라 무대 매너에서까지 성실하고 프로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무대는 끝났지만 로비에는 키신의 사인을 기다리는 관객으로 이미 가득 찼다. 키신은 밤 10시까지 로비를 가득 메운 관객들 한 명 한 명을 위해 사인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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