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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압박받는 사우디·이란에 손 내미는 러시아(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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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압박받는 사우디·이란에 손 내미는 러시아(종합)
'카슈끄지 수렁'에 빠진 사우디 옹호…서방 대거 불참한 FII에 대표단 파견
이란, 미 경제 제재 맞서 러시아와 접근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했던가.
중동의 '숙적'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미국과 동시에 갈등을 빚는 보기 드문 상황이 중동에서 전개되면서 그 틈을 러시아가 빠르게 메워가면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인도주의, 인권, 군사적 개입 등 서방이 국제법과 도덕적 명분을 놓고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사이에 이런 문제에 별로 개의치 않는 러시아가 이른바 '인권 후진국'이 즐비한 중동에서 영향력을 넓히는 모양새다.
미국과 적대적인 이란이 러시아와 전략적으로 협력한다는 사실은 새로운 게 아니지만 미국의 전통 우방으로 불리던 사우디까지 눈에 띄게 러시아와 급속히 밀착하는 모양새다.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으로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우디에 손을 내민 건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였다.
우발적 과실치사라는 사우디의 주장이 국제 사회의 불신과 냉소를 받는 동안 한 곳이라도 더 우군이 절실했던 사우디로선 고맙고 반가운 '친구'가 아닐 수 없을 터다.
이번 사건이 사우디 왕실이 지시한 계획적 암살이라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는 동안 '찰떡 공조'를 과시했던 미국은 갈팡질팡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사건 초기 '가혹한 처벌'을 언급했다가 20일 사우디 검찰이 우발적 과실치사라고 발표하자 "긍정적인 큰 첫걸음"이라고 두둔하더니 23일엔 이 사건이 사상 최악의 은폐라면서 강경하게 돌아섰다.
미 의회 일각에서는 사우디에 대해 경제 제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와 '전통 우방'이라는 외교적 수사가 순식간에 무색해졌다.
미국은 이미 인권 침해와 관련, 이란을 제재하는 만큼 언론인을 살해한 사우디를 묵과한다면 이중잣대라는 형평성 논란에 휘말려 미국의 '경제 무기'인 제재의 정당성마저 흔들릴 수 있다.
미국이 중동의 두 축인 사우디와 이란을 동시에 제재하는 기묘한 광경이 벌어질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반면 러시아 크렘린 궁은 23일 낸 성명에서 카슈끄지 사건에 대한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거부하면서 "그 사건의 검증된 정보가 있어야 대응할 수 있다"며 "러시아는 왕실이 살해와 관련 없다는 사우디의 공식 발표를 인정한다"고 밝혔다.
사우디의 영향력이 큰 아랍권 외에 사우디를 옹호한 곳은 사실상 러시아가 유일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지난 18일 "무엇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서 사우디와 관계를 왜 망쳐야 하느냐"며 사우디를 두둔했다.
카슈끄지 사건에 휘말린 사우디와 어정쩡한 미국 사이에 벌어진 틈과 이를 적시에 치고 들어온 러시아의 전략적 판단은 23일 리야드에서 열린 미래투자이니셔티브(FII)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JP모건, 스탠다드차타드, 포드 등 미국 대표 기업의 CEO와 뉴욕타임스, CNN 등 미국 언론이 카슈끄지 사건을 둘러싸고 커지는 사우디 왕가의 배후 의혹으로 줄줄이 불참을 선언했다.


이들의 빈자리를 메운 건 러시아였다.
23일 개막식 직후 열려 주목도가 가장 높았던 패널토론엔 러시아 국부펀드 직접투자펀드(RDIF)의 키릴 드리트리에프 최고경영자(CEO)가 토론자로 나왔다.
지난해 이 자리엔 손정의(孫正義·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이 앉았다.
이 외에도 시부르 홀딩스의 드미트리 코노프 회장, 알로사의 세르게이 이바노프 CEO, VTB 은행의 안드레이 코스친 회장, 석유재벌 미하일 구트세리에프 등 거물급 러시아 기업인이 러시아 대표단을 구성해 리야드를 찾았다.
사우디 국영 아랍뉴스도 23일 "서방의 여러 경영인이 카슈끄지 피살 사건 이후 불참했지만, 러시아와 중국에서 대규모 투자 협력을 타진해 왔다"며 러시아의 존재감을 부각했다.
사우디도 올해 말 산유량 조절과 관련해 러시아와 장기적인 합의를 맺겠다며 러시아에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사우디는 비록 카슈끄지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지만 인권 문제에 무신경한 러시아를 균형추로 삼아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의 인권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보낸 셈이다.

이란 역시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경제 제재에 맞서 돌파구를 러시아와 협력에서 찾고 있다.
러시아와는 이미 시리아 내전과 이슬람국가(IS) 격퇴전을 통해 돈독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 진영의 영향력을 무산시킨 '성공적인' 공조를 이뤄냈다.
러시아가 이란과 적대적인 사우디, 이스라엘과 모두 밀접한 탓에 이란의 혈맹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적의 적은 동지'라는 이해관계 속에서 미국의 제재를 함께 받는 처지인 양국은 전략적으로 상대방이 필요하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이달 18일 "서쪽을 보지 말고 동쪽을 보라"고 연설했다.
미국은 물론,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를 유지하겠다는 유럽 등 서방은 믿지 말고 러시아와 중국 등과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최고지도자의 최측근 알리 아크바르 벨라야티 수석보좌관은 7월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난 뒤 "러시아가 이란을 떠나기로 한 서방을 대체해 에너지 분야에 500억 달러를 투자할 준비가 됐다고 한다"며 "이란과 러시아가 협력을 증진해 '고집불통'(트럼프 대통령)에 맞서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다음달 5일 재개되는 미국의 이란산 원유 수출 제재가 임박하자 이란 고위 관료들이 러시아를 빈번히 방문하고 있다.
미국의 강경한 대이란, 대러시아 정책이 오히려 이런 협력을 강화하는 셈이다.
경제 분야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양국은 가깝다.
이란은 2016년 러시아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 S-300을 도입했으며, 이란 공군의 주력기와 육군의 장비는 옛 소련제를 기반으로 한다. 러시아 전투기의 시리아 내 작전을 위해 이란은 자국 내 공군기지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란의 부셰르 원자력 발전소도 러시아 컨소시엄이 주도해 건설 중이다.
hska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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