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이동원 "같이 공연하면 '사랑해'야죠, 우리도 그래요"
은희 데뷔 47년 만의 첫 단독 콘서트에 이동원 스페셜 게스트
"시 '엉겅퀴꽃' 노래로 내고 싶어"·"북한 테너와 '향수' 듀엣하고파"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대략 20년 전쯤이다. 가수 은희(본명 김은희·67)는 작곡가 김희갑으로부터 "내 노래 하나 해달라"는 앨범 참여 제안을 받았다. 녹음실에 가니 앞 타임에 가수 이동원(67)이 녹음하고 있었다.
"원래 제가 팬이었어요. 이동원 선생님의 '이별노래'를 듣고 소름 끼친 적이 있거든요. 그날 처음 뵙고서 '내가 만드는 갈옷(감물을 들인 옷)이 참 잘 어울릴 분이구나'란 생각을 했죠."(은희)
'꽃반지 끼고'로 사랑받은 1970년대 포크 가수 은희가 예쁜 목소리로 첫 기억을 꺼냈다.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는 '향수'와 '가을편지', '이별노래' 등으로 유명한 '시로 노래하는 가수' 이동원.
최근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서 만난 두 사람은 오랜 인연에도 "선생님", "은희 씨"라며 깍듯하게 존칭을 썼다. 이 자리에서 동갑내기란 사실을 처음 안 이들은 "우리가 친구였네"라고 놀라워했다.
전남 함평에 사는 은희와 전남 곡성에 사는 이동원은 "한양 구경이 오랜만"이다.
두 사람은 다음 달 서울에서 한 무대에 오른다. 은희가 10월 13일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데뷔 47년 만에 처음 여는 단독 콘서트에 이동원이 스페셜 게스트로 출연한다.
은희는 "어렸을 땐 음악의 위대함을 몰랐다. 철이 들면서 음악이 가장 강하고 심플한 메시지란 걸 깨달았다"고 운을 뗐다.
"'할머니가 되면 머리 쪽지고 한복 입고 기타 들고 할머니 가수로 데뷔할 거야'란 말이 무대를 떠나있던 제겐 위로였어요. 공연을 준비하며 마음이 진지해졌죠. 반성도 많이 하고. 제가 받은 사랑을 드리고 싶어요."(은희)
그러자 이동원은 "많은 나이라고 생각 안 한다"며 "노래는 끝이 없다. 목소리 단련, 테크닉도 필요하지만, 노래라는 건 대화이니 설득력을 가지려면 진정성이 중요하다. 인생의 맛을 좀 아는 은희 씨와 난 진정성을 아는 나이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이번 공연은 참 훈훈할 것 같다"고 말을 보탰다.
"같이 공연하면 사랑해야 하잖아요. 우리도 그래요. 지금. 하하하~."(은희)
두 사람은 공연에서 선보일 듀엣곡 중 정태춘-박은옥의 '사랑하는 이에게'도 골라놨다. 은희는 "우린 목소리 떨림인 바이브레이션 스타일도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 듀엣으로 나가면 좋겠다"고 유머를 섞었다.
은희는 이번 공연에 나서며 '시작'이란 단어에 방점을 찍었다. 최근 KBS 2TV '불후의 명곡'에 전설로 출연해 오랜만에 TV 나들이도 했다. 그의 조카는 그가 호숫가에 살다가 고요하게 바다로 나간 것 같다고 했단다.
"'잇츠 저스트 비기닝'(It's just beginning)이죠. 그간 공연 제안을 거절했는데, 살면서 선택할 수 있는 힘도 쌓였어요. 그래도 '불후의 명곡' 녹화 때 조명이 번쩍거려 혼이 달아났죠. 고두심(은희와 초·중·고 동창)은 '눈을 딱 깔고 성질대로 해'라고 했지만…. 그날 후배 가수들이 저를 쳐다보는 눈빛들이 너무 예뻤어요. 행복했죠."(은희)
두 사람은 "1~2시간에 많은 날을 요약하기 어렵다"면서도 흑백 시절 이야기를 만담처럼 주고받았다.
제주 출신 은희는 1971년 혼성 포크듀오 '라나 에 로스포'(은희, 故한민)로 데뷔해 '사랑해'가 히트하며 목소리를 알렸다. 몇 개월 안돼 솔로로 전향한 그는 1971~1974년 37장 레코드를 냈다. '꽃반지 끼고', '꿈길', '회상'과 번안곡 '연가', '사모하는 마음', '쌍뚜아 마미', '등대지기' 등이 히트했다. 그중 '사랑해'는 1972년 북한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남북 대표가 손을 맞잡고 부른 노래로 유명하다.
"명동 미도파백화점 4~5층을 빌려 음악 살롱을 하던 친한 오빠가 있었죠. 전보를 받고 그 오빠 집에 갔다가 한민 씨를 우연히 만나 호기심으로 1주일 연습하고 나온 게 '사랑해'예요. 당시 그 음악 살롱에서 신중현, 박인희 씨와 뚜아에무아도 봤고 그곳에서 방송사 공개방송이 열리기도 했죠."(은희)
'사랑해'가 나온 지 얼마 안 돼 한 레코드사 대표가 은희를 찾아왔다. 1년 계약금으로 1만원을 줄 테니 전속계약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공무원 월급이 1만원이던 시절이다.
은희는 "걸어 다니던 애에게 1만원을 준다고 했다. 그렇게 나온 게 '꽃반지 끼고'이다. MC 이상벽 씨가 당시 초년생 기자였는데 '은희 1만원 받고 전속했다'는 기사를 특종으로 썼다"고 기억했다.
이후 은희는 당시 최대 레코드사인 지구레코드로 옮겼다. 지구레코드 임정수 사장은 당시 300만원의 계약금을 주고 은희를 스카우트 했다. "액수가 비밀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죽 활동했죠."
그러자 이동원은 "묘령의 예쁜 여자가 긴 치마를 입고 통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했다"며 "'꽃반지 끼고'는 선풍적이었다. 소위 '뽕짝'이 인기일 때인데 이런 노래가 처음이었으니"라고 떠올렸다.
"그때 맥시스커트(긴 치마)를 입고 모자에 꽃도 달았죠. 계단 내려갈 때 긴 치맛자락을 안 잡고 질질 끌고 다녀 '명동 청소부'로 불렸어요. 하하하."(은희)
1970년 솔로로 데뷔해 지금껏 17장 앨범을 낸 이동원도 은희처럼 뜻하지 않게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고교 1학년 때 집안이 풍비박산 났고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 공부 대신 기타를 들고 명동으로 나왔다.
그는 "기타 하나 둘러메고서 기웃거리다가 여기서 한 달 하다가 잘리고 저기서 한 달 하다가 잘리고"라며 "그때 통기타 세대를 보면 가수가 되겠다기보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 음악이 좋아 기웃거린 사람들이다. 요즘처럼 가수를 기획사가 키우는 시대가 아니었다"고 돌아봤다.
그러나 은희는 3년간 짧고 굵게 활동한 뒤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결혼하고 뉴욕주립대에서 패션디자인을 공부했다. 여린 성격에 여러 말이 난무하는 연예계 생활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1985년 귀국한 그는 1989년부터 제주 전통의 노동복인 갈옷에 주목해 '봅데강'이란 패션 브랜드를 만들었다. 2003년 전남 함평에 정착해 7천평 규모 폐교를 개조한 뒤 자택 겸 감물 염색 체험장 민예학당으로 쓰고 있다.
"천연 염색을 세계에 알리려고 만들어낸 디자인이 6천개 이상 돼요. 민예학당으로 이름 붙인 것은 천연 염색을 연구하고 계승 발전시키자는 취지예요."(은희)
이동원은 "갈옷 디자인은 창작"이라며 은희에게 어울리는 길이라고 칭찬했다.
은희와 달리 그는 음악 외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음악은 내 인생"이라며 그것밖에 한 게 없다고 웃음 지었다. 시로 노래하는 이유는 "내가 그 시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여전히 시골에서 자연과 벗하며 산다. 2004년부터 경북 청도에서 10년간 살다가 "멍청해지는 느낌이 들어" 서울서 다시 몇 년을 살았지만 다시 시골이 그리워졌다고 한다.
"이젠 도시에 오면 겁이 나요. 시선이 너무 복잡해요. 도시에는 못 살 것 같아요."(이동원)
두 사람은 여전히 다가가고픈 꿈이 있다.
은희는 민영 시인의 시 '엉겅퀴꽃'을 노래로 내고 싶다며 그 자리에서 가사를 읊조렸다.
'엉겅퀴야 엉겅퀴야 엉겅퀴야 철원평야 엉겅퀴야 난리 통에 서방 잃고 홀로 사는 엉겅퀴야'('엉겅퀴꽃')
"이산의 아픔이 담긴 노래인데, 민영 선생이 가사로 쓰라고 주셨지만 아직 못 불렀죠."(은희)
이동원도 소망이 이뤄질 거로 믿는다면서 "북한의 테너와 '향수'를 같이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이 노래는 이데올로기가 없잖아요. 남과 북이 마음을 합하는데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잘 되고 있으니."(이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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