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울진 금강소나무숲길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하늘 지붕의 기둥'
(울진=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소나무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나무가 또 있을까. 예부터 지조와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진 소나무는 선비들이 대나무, 매화와 함께 '추운 겨울의 세 벗'(歲寒三友)이라 부르며 즐겨 그렸다. 아기가 태어나면 생솔가지를 끼워 금줄을 쳤고, 솔가지와 솔잎을 태워 밥을 지었다. 소나무 속껍질(송기)은 가난한 이들이 곤궁한 시절을 견디게 해줬으며, 가을에 나는 향긋한 송이는 최고의 미식을 선사한다. 애국가는 물론,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노래(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에도 소나무는 빠지지 않는다.
한 시인이 '소나무의 정부' '소나무의 궁궐'이라고 노래한 경북 울진의 금강소나무숲에 가면 소나무의 그 오랜 위용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소나무 중에서도 금강산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아래로 강원도 강릉과 삼척, 경북 봉화와 울진 일대에서 자라는 금강소나무는 키가 크고 줄기는 곧고 단단해 궁궐과 사찰이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게 한 버팀목이었다. 임금의 관을 만들 때는 금강소나무의 안쪽, 색이 짙은 심재만을 사용해 '황장목'(黃腸木)이라고도 불렀다. 오지에서 벌채된 금강소나무는 기차가 닿는 경북 봉화 춘양역으로 옮겨져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운송됐다. '춘양목'(春陽木)이란 이름이 붙은 배경이다. '강송'(鋼松)은 금강송을 줄인 말이기도 하고, 재질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껍질이 붉은색을 띠고 있어 '적송'(赤松)이라고도 부른다.
금강소나무 최대 군락지인 경북 울진군 북면과 금강송면의 '금강소나무숲길'은 산림청이 만든 1호 숲길이자, 국내외에서 손꼽히는 걷기 여행길이다. 첩첩산중의 두메에서 일제의 수탈과 전쟁의 화마를 피하며 수백 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소나무가 경이로운 모습으로 탐방객을 맞이한다.
이곳은 조선 숙종 6년(1680년) 황장목 생산을 위해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한 황장봉산으로 지정된 이후 현재까지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국가가 보호·관리하고 있다. 금강소나무숲길 역시 예약을 통해 구간당 하루 80명만이 숲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탐방할 수 있고, 탐방객에게 지역 주민이 제공하는 민박과 도시락을 권장한다.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지역 주민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책임여행, 생태관광을 추구하는 것이다.
◇ 비 오는 날의 숲으로
600년 된 대왕소나무를 볼 수 있다는 4구간을 골랐다. 처음 만들어졌을 땐 난도 최상의 전문 산악인 코스였다가 나중에 중상 수준으로 조정됐다. 그러나 구간 길이는 10㎞가 넘고 고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산행 초보에게는 여전히 만만치 않은 길이다. 오랜만에 샘솟은 도전 의식이 사라지기 전에 예약을 마쳤다.
애써 다진 굳은 결의는 사실 무색해졌다. 먼 길을 달려 탐방 전날인 8월 30일 울진에 도착하니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가늘어졌다가 굵어졌다 하며 마음도 같이 졸아들었다 풀어졌다 했다. 오전 8시 40분 집합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맞춰놓은 새벽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거센 빗소리에 놀라 저절로 눈이 떠졌다. 걱정이 한가득 몰려들었지만, 어제저녁 집합 시간과 장소를 안내하는 문자 이후 우천으로 인한 취소를 알리는 새로운 문자는 도착하지 않았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뚫고 구불구불 시골길과 물이 차오른 계곡 길을 달려 4구간 탐방 집합소인 소광리 노인회관에 도착했다. 그제야 '이쯤이야' 할 정도로 조금 안심이 될 만큼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사실 비는 이미 며칠 전부터 예보된 터라 정원보다는 훨씬 적은 13명이 이날 탐방 신청을 했고, 신청자 중 절반이 나타나지 않았다. 구민정 해설사는 "늦장마와 폭우로 계곡물이 넘쳐 징검다리를 몇 개 건너야 하는 4구간 탐방은 불가능하다"고 안내했다. 하지만 곧 "이런 궂은 날에 멀리까지 왔으니 아무나 볼 수 없는 멋진 곳으로 안내하겠다"며 다소 침울하게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이날 구 해설사가 탐방객을 이끈 곳은 올해부터 시범운영을 시작한 가족탐방로였다. 정규 코스인 1∼5구간은 10∼17㎞에 달해 노인이나 어린이가 함께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가족탐방로는 5㎞ 남짓으로, 오르막길은 대부분 널찍한 임도에, 내려오는 산길도 험하지 않다. 대왕소나무 대신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오백년송부터 못난이송과 미인송, 소나무숲을 내려다보는 관망대를 거쳐 군락지를 관통해 내려온다. 이날은 비 때문에 가능한 곳까지 차로 이동했고, 징검다리가 잠긴 곳은 피했기 때문에 평소 운영되는 가족탐방로와 일부 구간이 달랐다.
◇ '소나무의 나라'
무려 16.7㎞를 걸어야 하는 최장 코스인 3구간이 거의 끝나는 곳에서 본격적인 탐방이 시작됐다.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 금강소나무가 파노라마로 펼쳐진 주변을 둘러보며 벌써 감탄이 나오는데, 감동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일단 소나무에서 편백보다 훨씬 더 많은 피톤치드가 나온다는 말에 숨을 더 깊게 들이마셨다.
시작은 소광리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이다. 40년 이상 된 나무들만 자라고 있는 현 상태를 방치하면 큰 나무들이 죽었을 때 금강소나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금강소나무가 너무 밀집한 곳에서는 솎아내고, 소나무와 경쟁하는 활엽수는 제거해 우량 금강소나무숲으로 가꾸고 있다. 후계림에서는 어미나무를 남겨두고 잡목들을 정리한 뒤 어미나무에서 자연적으로 떨어져 나온 종자가 자연 발아하도록 하거나, 우량 종자로 양묘장에서 옮겨 심은 어린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생태경영림 입구를 지나면 안도현 시인의 '울진금강송을 노래함'이 새겨진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소나무의 정부' '소나무의 궁궐' '금강송의 나라'로 성큼 발을 내디딘다.
"소나무의 정부가 어디 있을까?
소나무의 궁궐이 어디 있을까?
묻지 말고,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소광리로 가자
아침에 한 나무가 일어서서 하늘을 떠받치면
또 한 나무가 일어서고 그러면
또 한 나무가 따라 일어서서
하늘지붕의 기둥이 되는
금강송의 나라…(후략)"
금강소나무전시실에 들어가 돌처럼 차갑고 단단한 황장목 통나무 의자에 앉았다. 숲에서는 볼 수 없는 금강소나무의 속을 볼 수 있다. 판재와 단면목으로 나란히 전시해 놓은 일반 소나무와 금강소나무는 그 차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일반 소나무는 옹이가 많고 심재가 50% 정도라면, 금강소나무는 옹이 하나 없이 매끈하고, 심재가 80% 이상이다. 척박한 땅에 자기 키만큼 뿌리를 내리는 금강소나무는 더디게 자라기 때문에 일반 소나무보다 나이테가 세 배나 촘촘하다. 그만큼 단단하고 뒤틀림이 적다. 또 항균 성분이 있는 송진의 함량이 높아 쉽게 썩지 않는다. 한쪽에는 수령 230년, 키 23m의 고사한 금강소나무 한 그루를 베어 껍질을 벗기고 아홉 토막으로 잘라 쌓아 놓았다. 구 해설사는 "금강소나무는 스스로 가지치기를 하기 때문에 옹이가 생기지 않는다"며 "이런 금강소나무 한 그루면 집 한 칸을 지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실 옆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오백년송이 서 있다. 지름이 96㎝, 키가 25m에 달하는 이 소나무는 소광리 금강소나무숲의 터줏대감이다. 오랜 세월 풍상을 견딘 가지들은 제각기 용틀임을 하고 있고, 허리춤에는 이름 모를 활엽수의 씨앗이 내려앉아 터를 잡았다. 금강소나무는 수령이 더해갈수록 껍질이 육각형 모양으로 갈라지는데, 거북이 등처럼 그 모양이 선명하다. 바로 옆에 흐르는 계곡을 향해 몸을 굽혀 그 기울기를 확인할 수 있는 추가 달렸다. 이곳이 금강소나무숲길 3구간의 끝이다.
◇ 비가 선물한 소나무숲 비경
숲으로 더 들어가면서 노란색 페인트로 띠가 둘려진 소나무들이 보였다. 문화재 복원용으로 선별해 놓은 나무들이다. 현재 총 4천137그루가 문화재용으로 자라고 있다. 2005년 산림청과 문화재청이 금강소나무 후계림을 조성하면서 만들어 놓은 타임캡슐도 보인다. 소나무 종자와 키우는 방법 등 관련 자료를 담아 150년 뒤에 개봉하도록 했다.
보라색 꽃잎이 고운 개미취를 구경하며 조금 더 오르면 첫 번째 포토존인 못난이 소나무가 나온다. 산을 오래 지킨다는 그 못생긴 나무다. 밑동에서 줄기가 갈라져 자라 목재로서의 가치는 없지만, 보기에는 더 좋다. 못난이 소나무 주변 잡목은 제거하고, 소나무가 올려다보이는 곳에는 앉기 좋은 돌을 두어 잠시 쉬며 온전한 모습을 감상하기 좋게 해놓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미인송을 만난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마련된 발판에 올라서야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키가 크다. 이름대로 흠잡을 데 없이 곧다. 줄기가 아무리 곧아도 가지는 대칭을 이루지 않는 나무가 훨씬 많은데, 해와 물을 향해 가지를 뻗기 때문이라고 한다.
군락지 관망대에 도착했을 즈음엔 어느샌가 우산을 접어도 될 만큼 비가 잦아들었다. 비에 젖은 금강송은 제 줄기의 붉은빛을 더 선명히 드러냈다. 소나무의 푸른 잎 사이로 흐르는 산안개는 당장 산신령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누군가는 굵직한 탄성을 내뱉었고, 누군가는 잠시 말을 잃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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