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베를린] 식민지 학살 속죄탓인가…베를린 점령한 아프리카 예술
'또다른 영웅 필요없어' 베를린 비엔날레…반 식민주의·인종차별 의식 오롯
'게르만 우수성' 입증 위해 나미비아서 가져간 두개골 반환 의식도
진행형인 독일의 '아프리카 과거사 청산' 주목
[※편집자 주 = 여섯 번째 이야기. 독일 수도 베를린은 유럽에서 가장 '힙(hip)'한 도시로 부상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과 냉전체제의 유산을 간직한 회색도시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젊은 예술가들로 인해 자유분방한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최근엔 유럽의 새로운 IT와 정치 중심지로도 각광받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특색 탓인지 베를린의 전시·공연은 사회·정치·경제적 문제의식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힙베를린'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현상을 창(窓)으로 삼아 사회적 문제를 바라봅니다.]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19세기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원주민 학살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인가. 독일 수도에서 벌어지는 예술축제 베를린 비엔날레는 아프리카 작가들의 작품으로 가득 찼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가비 느코보를 총감독으로 하는 코디네이터 5명 모두 아프리카 배경이다.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한 베를린 비엔날레의 제목은 '우리는 또 다른 영웅이 필요 없다'(We Don't Need Another Hero)이다. 미국 가수 티나 터너가 1985년 부른 곡으로, 핵전쟁 후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 '매드 맥스 3'의 주제음악이기도 하다.
이 제목은 승리자의 이야기와 배경을 중심으로 한 서구 세계의 서사구조를 배격한다.
미국과 유럽에서 '스토롱맨' 지도자가 속속 등장하고 극우 세력이 부상하는 데다, 강자의 논리에 의한 전쟁이 취약지역에서 여전한 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주최 측은 비엔날레에서 식민주의, 후기식민주의, 다양성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프리카 배경의 코디네이터와 작가들이 비엔날레를 꾸민 데다, 작품들의 주제의식에서 이런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가비 느코보는 공영방송 도이체벨레와의 인터뷰에서 "중요한 정치적 문제와 연관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언어로 정의하려고 노력했다"면서 비엔날레 제목에 대해선 "그룹으로서 우리가 함께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긍정적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번 비엔날레의 메인 전시장인 쿤스트베르케 전시장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대형 설치 작품에서도 후기식민주의 및 인종차별 등과 관련한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한 층을 가득 채운 붉은 황톳빛 공간에는 남아공 출신 작가 디네오 제시 보파페의 설치 작품 'Untitled (Of Eccult Instability)[Feeling]'이 전시돼 있다.
전쟁, 폭력으로 인한 폐허를 연상케 하듯 부서진 벽돌과 나무판, 합판지가 널브러져 있다. 모니터에는 2003년 작고한 미국 출신 흑인 재즈 음악가이자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벌인 니나 시몬의 공연 장면이 흘러나왔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흰색 비닐 벽 뒤에서 여성들이 격렬한 안무를 했다가 갑자기 멈춰선 채 침묵의 시간을 연출했다. 나이지리아 동부 여성들이 권력집단에 저항해 벌이는 시위 형태를 담았단다.
체트카우 전시장의 'Operation Sunken Sea(The Anti-Control Room)'이란 비디오 설치작품에서는 여러 명이 성명을 통해 지중해를 지배해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이집트 출신의 작가 헤바 Y. 아민은 실현 불가능한 상황을 제시해 아이러니를 보여줬다.
베를린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던 지난 29일 베를린의 한 교회에서는 독일 당국이 25명가량의 두개골 등 뼈를 나미비아 측에 돌려주는 행사가 열렸다.
독일이 나미비아를 식민통치하던 당시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입증하겠다며 연구차 가져간 것이었다. 독일은 카메룬과 르완다, 토고 등의 식민지에서도 두개골을 가져갔다.
특히 독일은 이들 국가 가운데 나미비아에 대해 죄의식이 강하다.
1884년부터 나미비아를 식민통치한 독일은 1904년 수탈에 견디지 못하고 봉기한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학살했다.
마을을 초토화하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 사막으로 쫓겨난 헤레로족들은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갔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1908년까지 이어진 학살로 헤레로족의 75%, 나마족의 절반가량이 죽어 나갔다. 피해자는 최대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은 110여 년이 지난 2015년에서야 처음으로 집단학살을 인정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저질러진 유대인 학살을 마주하는 자세와는 완연히 달랐다.
1970년 당시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은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는 등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진솔한 사과를 해왔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기회가 될 때마다 '영원한 책임'을 강조해왔다. 이스라엘도 자주 찾는다. 최근 독일에서 확산되는 반(反)유대주의에 대해서도 강력히 대응하고 있다.
반면, 독일 정부는 헤레로족과 나마족의 후손들이 미국 법원을 통해 진행하는 배상 청구 소송에는 협조하지 않는 등 유대인 문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왔다.
독일 정부는 나미비아 학살을 인정한 후 나미비아 정부 측과 배상 협상을 진행하고 있으나, 좀처럼 매듭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는 지난 1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우리는 식민지 시절 (아프리카에) 많은 빚을 졌다"면서 "아프리카를 돕고 경제 발전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 부채의식을 드러냈다.
베를린 비엔날레에서 사실상의 아프리카 작품전을 벌인 것도 이런 의식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잘못을 철저히 인정하고 반성해 역사적 화해를 가능케 해온 독일이 아프리카 식민지배 문제는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lkbin@yna.co.kr #힙베를린 #hip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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