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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서독 이산가족은…'눈물의 궁전' 거쳤지만 상봉기회 지속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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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서독 이산가족은…'눈물의 궁전' 거쳤지만 상봉기회 지속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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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서독 이산가족은…'눈물의 궁전' 거쳤지만 상봉기회 지속적
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후 왕래 어려워져…70년대 조약 맺어 제약속 왕래
당시 이산가족 "서로 생활 달랐지만 가족이 만난다는 것 자체가 중요"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18일(현지시간) 독일 수도 베를린 프리드리히 슈트라세역 바로 옆의 한 작은 박물관에는 수십 명의 관람객이 찬찬히 전시물들을 들여다보았다.
여권에 통행 도장을 찍어주는 심사대와 건물 앞에서 자매인듯한 이들이 얼싸안은 채 상대의 얼굴을 쓰다듬는 사진은 이곳의 과거를 짐작게 한다.
독일 통일 전 동서독 주민들이 다른 편에 사는 가족 및 친지를 만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경로였다.
동베를린에 속한 곳이지만, 동독에서 가족을 만난 서독 주민들이 이곳을 통해 서베를린으로 넘어갔다. 서독을 찾은 동독 주민도 마찬가지였다.
남북한 상황으로 치면 '금강산 면회소'처럼 특별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이 헤어지고 통행증 심사를 받던 역 옆의 대합실은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트래넨 팔라스트'(눈물의 궁전)라고 명명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곳은 왕래를 위한 곳이기도 했지만,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하기 위한 통로이기도 했다.
통일 이후 10년 넘게 방치됐고 클럽 등으로 사용됐다가 2003년 이후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는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베를린을 방문할 당시 김정숙 여사가 다녀가기도 했다.
그런데 동서독의 이산가족은 남북한의 이산가족과 비교해선 행복했다.
이들은 쉽진 않았지만, 왕래가 가능했다. 수십 년을 기다려도 이산가족 상봉 대열에 끼기가 쉽지 않은 우리와는 달랐다.



동서독 분단 이후 서독 주민들은 30일간 동독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다.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이주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1956년 헝가리 혁명과 폴란드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이 이뤄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동독 주민 수십만 명이 서독으로 향했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동독에서 농업 부문의 집단화 및 국유화가 진행된 점도 서독으로의 이주를 부추겼다.
동독 정부가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을 세운 것은 주민의 탈출을 막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이후 서베를린 지역 주민이 자유롭게 동베를린을 방문할 길이 막혔다.
베를린 장벽으로 이산가족이 만날 수 없게 된 후 서독 측은 동독 측에 요구해 1964년 11월에는 동서 베를린 자유왕래 협정이 체결됐다.
동독에 거주하는 65세 이상 남자와 60세 이상 여자는 1년에 4주간 서독에 머물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60세 미만이더라도 서독에 거주하는 직계가족의 출생 및 결혼식, 60세·65세·70세 생일잔치 등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양측에서 연간 100만 명 정도가 각각 상대 지역을 찾았다.
더구나 1972년 5월 교통조약이 체결된 데 이어 1973년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동서독 주민이 각각 일정 조건만 갖추면 상대 지역에서 30일간 체류할 수 있게 됐다.
양측 주민 간에는 전화통화도 가능했다. 서독 정부는 전화통화가 원활하도록 동서독 간 통신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자금을 지원했다.
서신도 대부분 5일 안에 도착할 정도로 양측 간 네트워크가 갖춰져 있었다.
통일 이전 이산가족 가정 출신으로 서베를린 시민이었던 케르스틴 샤펜베르크(53)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동독에 입국허가를 받기가 까다롭고 보안통제도 엄격했지만 동독에 사는 일부 친척들이 종종 찾아왔다"라며 "동독의 친척분들이 올 때마다 새로운 경험도 많이 하고 가족으로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다"고 소개했다.
그는 "그렇게 멀리서 사는 것도 아니었지만, 서로의 생활이 완전히 달랐다"라며 "뒤돌아보면 동독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동서독 이산가족 및 시민이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왕래가 가능했던 점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통일이 가능했던 주요 원인 중의 하나로 꼽혀왔다.
통일부 소속인 박원재 베를린자유대 방문학자는 통화에서 "떨어져 살아도 만나야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결속력이 생길 수 있다"라며 "당시 서독 정부는 동서독 주민에게 왕래시 통행료를 지원했는데, 이런 것이 왕래를 촉진하게 되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남북한은 오는 20∼22일 사흘간 2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연다. 이산가족의 헤어진 시점이 각각 다르지만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기준으로 본다면 65년여 만에 짧은 만남을 갖는 셈이다.
샤펜베르크는 "남북한에 있는 모든 이산가족이 희망을 가지며 앞으로 자주 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고, 이런 과정에서 통일이 이뤄지길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말했다.


lkbi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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