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가치" vs "수탈 현장"…일제 흔적 존폐에 양론
안양 서이면사무소·충주 조선식산은행 건물 두고 존폐 논란
대구선 '일본 잔재' 향나무 제거…광명동굴 등 변모 성공사례도
(전국종합=연합뉴스) 올해로 해방 73주년을 맞았지만,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일제강점기가 남긴 생채기는 세월이 흘러도 아물기는커녕 곳곳에서 덧나고 있다.
당시 지어진 건축물, 수탈 현장 등을 둘러싼 존폐 논란도 이 가운데 하나로,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간 갈등 양상으로까지 번진 상황이다.
경기 안양 옛 서이면사무소의 경우, 굴곡진 역사에서 비롯된 갈등이 2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이 장소는 1941년 10월까지 서이면 면사무소로, 이어 1949년 8월까지는 안양면 면사무소로 사용되다가 안양의 읍 승격 이후 읍청사를 신축하면서 개인에게 매각돼 병원과 음식점 등으로 사용됐다.
경기도는 옛 서이면사무소가 지역에 남은 유일한 고건물로 가치가 있다며 2001년 1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00호로 등록했고, 시는 29억2천700여만원을 들여 이를 매입한 뒤 복원작업을 벌여 2003년 12월 일반에 공개했다.
문제는 해체·복원 과정에서 상량문에 적힌 '조선을 합하여 병풍을 삼았다. 새로 관청을 서이면에 지음에 마침 천장절(일왕의 생일)을 만나 들보를 울린다'는 경술국치를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내용의 글이 발견되고 초대 면장이 조선총독부로부터 두 차례 훈장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작됐다.
곧바로 친일 잔재 복원 논란이 불거졌고 2004년 시민단체들은 서이면사무소의 개관 중지 등을 요구하며 당시 시장을 경찰에 고소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시가 이전을 요구하는 여론에 따라 도에 문화재 지정 해제를 신청했지만, 경기도문화재위원회는 근대화 과정의 아픈 역사가 보존돼 있다며 부결했다.
갈등은 올해도 여전해 일부 상인과 주민들은 "일제 잔재인 서이면사무소가 안양역 인근 최대 상가 밀집지역인 1번가에 자리 잡고 있어 지역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며 문화재 지정 해제와 이전을 요구하고 있지만 시는 문화재 지정 해제나 이전 모두 여건상 어려움이 많아 관망하는 상태이다.
충북 충주의 조선식산은행 건물도 비슷한 논란을 겪고 있다.
1918년 한성농공은행 등 6개 은행을 합병해 설립한 이 은행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일제가 우리 민족자본을 수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시는 1933년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 건물을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자 지난해 복원을 결정했지만, 일부 시민단체는 "이미 수명을 다한 건물은 철거해야 마땅하다", "역사나 지역주민의 정서에 반하는 조치"라고 주장하며 반발하고 있다.
대구에서는 최근까지 일제 잔재로 알려진 '가이즈카 향나무' 제거 작업이 활발했다.
2015년 달성공원에 이토 히로부미가 기념식수한 향나무 2그루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를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았고, 시는 이듬해 동상이나 문화재 주변 향나무를 중심으로 제거 작업을 벌여 달성공원과 망우당공원 등에 있던 200여 그루 가운데 절반가량을 뽑아냈다.
지금도 일부 시민단체는 향나무를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식물학자인 김종원 계명대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향나무에 관한 속설이 대부분 허구라고 반박하는 등 향나무 제거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처럼 일제 흔적의 처리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며 지역사회가 분열하는 경우와 달리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다크 투어리즘으로 활용, 변모에 성공한 사례도 있다.
경기 광명의 광명동굴은 1912년부터 1972년까지 금, 은, 동, 아연 등을 채굴하던 금속광산으로 채굴된 광물은 1931년까지 일본에 보내졌다.
일제 수탈의 현장이자 버려진 폐광으로 남아있던 이곳은 시가 2011년 사들인 뒤 와인레스토랑과 공연장, 각종 전시관을 갖춘 동굴테마파크로 개발해 2015년 다시 문을 열었고 지금은 연간 100만 명이 넘게 다녀가는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특히 광명동굴 입장료 수익의 일부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쓰여 지난해에는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 5천600만 원이 전달됐다.
이밖에 제주의 일본군 전투기 격납고와 지하벙커, 동굴진지 등도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부산의 일본군 포진지는 관광 자원화가 검토되고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이형진 씨는 "일제 건물이 없어진다고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일제의 잔재라고 모두 없애버리면 역사적 교훈은 책에서나 찾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종구 김근주 김용민 김형우 박정헌 변지철 임보연 우영식 장아름 조성민 차근호 최영수 최종호 기자)
zorb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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