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활판 인쇄 40년 만에 부활시킨 어느 인쇄공의 집념
전용태 책과인쇄박물관, 활판 인쇄로 김소월의 '진달래꽃''못잊어' 출간
(춘천=연합뉴스) 이해용 기자 = 글자 틀에 납물을 부어 활자를 만들고, 원고에 필요한 활자를 하나씩 뽑아내 책을 만들던 활판 인쇄는 1970년대 우리 곁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인쇄 공정이 단순화되면서 활자의 눌림에 따라 느껴지던 글자의 깊이나 손으로 만졌을 때 오톨도톨한 입체감도 함께 사라졌다.
수백만원에 이르던 활판 인쇄기는 한순간에 고철 신세가 됐다.
인쇄기에서 나오는 잉크 냄새가 그리워 어느 날 주변을 돌아봤을 때 활판 인쇄기는 세상에서 거의 종적을 감춰가고 있었다.
남은 인쇄기를 구할 수 있는 곳은 변화의 물결이 더딘 강화도 등 국내 섬이나 해외 벼룩시장이었다.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져 가던 활판 인쇄기를 구해낸 사람이 강원 춘천시 김유정 문학촌 인근에 2015년 '책과 인쇄박물관'을 개관한 전용태 관장이다.
1952년에 충남 연기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 시절 신문 배달을 하면서 신문 잉크 냄새에 묘한 쾌감을 느껴 윤전기를 돌리는 신문사와 충무로에서 인쇄 관련 일을 30년 동안 했다.
인쇄기와 각종 희귀 시집 초간본 등으로 박물관을 연 그에게는 또 다른 꿈이 있었다.
다양한 인쇄기를 박물관에 전시해 놓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납 활자를 만들어 활판 인쇄물만이 주는 입체감과 무게를 오롯이 복원하고 싶었다.
납을 녹여 활자를 하나씩 만들고, 활판 인쇄술을 이용해 옛날 방식으로 책을 만드는 건 무모해 보이는 도전이었다.
다행히 이 도전은 그가 박물관을 준비하면서 구해 놓은 활자를 만드는 주조기, 수십만 자의 자모, 활판 인쇄 기계들이 있어 현실화됐다.
첨단 기술이 자리 잡은 요즘 40년 전에 사라진 활판 인쇄술로 복원해 책을 찍는 작업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책에 필요한 다양한 크기의 글자를 하나씩 만들기 위해 수십t의 납을 사들이고, 활자를 만드는 주조 장인을 초청해 기본 활자를 만드는데 무려 2년이 걸렸다.
글자 하나에도 5∼6번의 손길이 가는 고된 작업이었다.
그는 이렇게 복원한 활판 인쇄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못잊어'를 최근 펴냈다.
1970년대 사라진 활판 인쇄가 마침내 40여 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
그는 책 띠지에 "활자가 지나간 자리, 그 흔적을 따라 눈으로 한번, 그리고 손으로 한 번 더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활판 인쇄의 세계로 초대한다"라고 소개했다.
이 책은 시중 서점에서도 시판될 예정이다.
활판 인쇄로 다시 찍어낸 '진달래꽃'과 '못잊어'의 책값은 컴퓨터로 찍어낸 일반 책보다 조금 비싼 2만5천원으로 책정했지만 사라져 가던 인쇄기를 구하고, 납을 녹여 인쇄에 필요한 글자를 하나하나씩 만든 장인의 손길과 노력을 참작하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
전 관장은 오는 8월에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 순수한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를 표현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활판 인쇄로 발간할 예정이다.
지난해 12월 처음 활판 인쇄로 발간한 김유정의 '봄·봄' 한정본은 박물관 내에서만 판매했지만 이미 모두 소진됐다.
그는 "40년 만에 활판 인쇄로 책을 출간하는 것은 출판 역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것"이라며 "활판 인쇄로 만든 책은 컴퓨터로 가볍게 만든 책보다 활자 무게만큼 더 묵직하게 다가올 것"이라고 말했다.
dmz@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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