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일주일] "저녁에 뭐 할까"…직장인들 '행복한 고민'
시차출퇴근제 등 달라진 근무여건…출근 전·퇴근 후 여가생활 여유
"관리자 퇴근 안 하면 팀원들도 연장근로"…정착까진 시간 걸릴 듯
극장·공연가 중심 문화예술계 관객 늘어 '반색'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임기창 이유미 이효석 기자 = "저녁에 운동하고 맥주 한잔 할 시간까지 생겼네요. 행복한 고민이죠."
주 52시간 근무제를 일주일간 경험해 본 근로자 300인 이상 기업체 직원들은 근무환경 변화로 여가가 늘어났다며 일단 반기는 분위기다.
시차출퇴근제를 적용해 출근시간이 늦춰져 아침 시간대에 여유가 생기거나, 퇴근시간이 당겨져 '긴 저녁'을 활용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민모(28)씨는 해외 거래처와 저녁에 연락을 주고받을 일이 많아 퇴근이 늦다 보니 입사 후 수년간 '오전 7∼8시 출근, 오후 8∼9시 퇴근'이라는 강도 높은 근무에 시달렸다.
그러나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회사에서 시차출퇴근제를 도입하면서 야근이 잡힌 날에는 오전 10시까지 출근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민씨는 "늦게 출근해도 되는 날에는 아침 운동을 하려고 이번 주에 헬스클럽에 등록했다"면서 "그동안 스트레스를 야식과 술로 달래느라 뱃살이 많이 쪘는데, 이제 아침운동으로 건강을 되찾고 싶다"고 말했다.
민씨와 반대로 아침시간대 업무가 많은 회사에 다녀 새벽 일찍 출근한다는 이모(28·여)씨는 그간 유동적이었던 퇴근 시간이 오후 5시로 정해지자 집 근처 필라테스 저녁반에 등록했다.
이씨는 "원래 퇴근시간이 불안정해 저녁 운동을 오후 8시쯤 했는데, 오후 5∼6시에 운동을 할 수 있게 되니 저녁 시간이 길어져 활용도가 높다"면서 "운동하고 맥주 한잔 할 시간이 생겨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며 웃었다.
자녀를 둔 여성 직원이 많은 대형 유통업계에서는 주 52시간 근무 도입으로 삶의 질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 2일부터 서울 중구 본점과 강남점을 제외한 전 점포의 개점시간을 오전 10시 30분에서 11시로 30분 늦췄다. 신세계 직원들뿐 아니라 매장에 입점한 협력사 직원들도 영업시간 변경을 크게 환영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인천점에서 매장 관리자로 일하는 손기율(44) 씨는 "백화점과 협력사에는 아무래도 여직원이 많고, 그중에서도 기혼자나 아이를 둔 사람들이 많은데 아침 시간을 여유 있게 활용하게 돼 반응이 폭발적이다"라고 말했다.
유통업계는 주 52시간 근무제 본격 시행에 따라 퇴근 후 직장인들을 겨냥한 세일 행사와 문화센터 강좌를 늘려 고객 끌기에 나서고 있다.
반면, 바뀐 제도가 아직 정착하지 않아 실제 삶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는 반응도 있었다.
박모(30)씨가 다니는 대기업은 이달 2일부터 'PC 오프제'를 도입했다. 오전 9시에 PC가 자동으로 켜지고, 오후 6시가 되면 자동으로 꺼지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박씨는 이번 주 내내 하루 1∼2시간씩 야근을 했다. 연장근무 신청과 결재가 간소한 절차로 이뤄지는 탓에 상사로부터 '퇴근하라'는 등 지시가 없으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연장근무를 신청했다고 한다.
박씨는 "관리자급은 PC 오프제 적용 대상에서 빠지니 관리자가 '칼퇴근'을 하지 않으면 팀원들도 자동으로 연장근무를 올리고 남게 된다"면서 "팀장이 '주 52시간제 취지는 좋지만 바쁘면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한 것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퇴근 시간이 당겨지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 같기는 하다"면서 "PC 오프제 등이 야근을 줄이는 '허들'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아직은 구멍이 많은 듯하다"고 지적했다.
업무와 비(非) 업무를 구분하는 가이드라인이 아직 명확히 마련되지 않은 부서 직원들은 그저 회사의 지침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한 대기업 홍보팀 직원은 "홍보팀은 신문 가판을 보고 나면 업무가 끝나고, 야간 인터넷 상황은 출근이 늦은 당직자가 담당하지만 퇴근 후 기자들을 만나는 행위를 업무로 볼지 아직 가이드라인이 없다"며 "업무에 포함된다면 다음날 오전에 쉬는 방안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달라진 근무환경은 교통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회사가 많은 강남권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은 "오전 차량 통행은 예전보다 훨씬 원활했지만, 저녁에는 지하철에 사람이 부쩍 많아진 느낌"이라고 입을 모았다.
조모(31)씨는 "시차출퇴근제 때문에 늦게 출근하는 사람이 많아져서인지 오전에 강남 쪽이 훨씬 덜 막히더라"면서 "반대로 저녁 6시30분 정도 되니 역삼역과 잠실역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극장·공연가 등 문화예술계는 주52시간 근무 시행으로 여가가 늘어난 상황을 새로운 기회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 주 52시간 근무가 시행된 7월 1일 이후 전국 극장을 찾은 관객 수는 의미 있는 증가 폭을 기록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7월 2·3일 전국 영화 관객 수는 각각 26만5천426명과 26만2천934명을 기록했다. 이는 전주와 비교하면 각각 16.4%와 13.6% 증가한 수치다.
한 멀티플렉스 관계자는 "4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앤트맨과 와스프'가 개봉하면서 수요일부터는 전주 대비 관객이 크게 늘었지만 월·화요일은 전주와 개봉작 라인업이 거의 같았다"며 "특별한 신작이 없었음에도 관객이 증가한 것은 분명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의 영향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첫날인 2일 뮤지컬 제작사인 신시컴퍼니는 일찍 퇴근한 직장인을 타깃으로 평일 공연에 한해 뮤지컬 '시카고'의 티켓을 50% 할인한 결과 1천장 이상이 판매됐다.
신시컴퍼니 관계자는 "평일 공연은 원래 할인율을 적용해도 티켓 판매가 확 늘기 어려운데 반응이 상당이 좋은 편"이라며 "저녁 여가가 늘어나면서 평일 저녁 공연도 할인율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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