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 욕하면서도 끊지 못하는 이유는
이엔 앙 교수의 '댈러스 보기의 즐거움' 번역출간
수용자 분석 "드라마 조롱하며 우월감 느껴"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인어아가씨, 아내의 유혹, 조강지처클럽, 너는 내 운명…
정말로 궁금하다. 사람들은 왜 욕을 하면서도 막장 드라마를 끊지 못할까. 아니 열광할까.
개연성 없는 전개와 비현실적인 설정을 비난하면서도 TV 드라마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시청자들의 심리를 분석한 TV 수용자 연구의 고전 '댈러스 보기의 즐거움'(원제 Watching Dallas: Soap Opera and the Melodramatic Imagination·나남출판)이 국내 처음 번역 출간됐다.
책은 1982년 네덜란드에서 출판됐다가 1985년 영어로 번역돼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저자는 저명한 미디어 연구자 이엔 앙 호주 웨스턴시드니대학 문화사회연구소 문화연구 특훈교수.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중국계 네덜란드인으로 '댈러스 보기의 즐거움'은 20대에 완성한 석사 논문이다.
'댈러스'는 1978년부터 1991년까지 14시즌 동안 총 357회 방영된 미국 CBS의 TV 연속극으로, 텍사스주 댈러스 인근의 호화로운 목장 저택을 무대로 펼쳐지는 석유재벌 유잉 가문의 이야기를 그린다.
'댈러스'는 터키, 호주, 홍콩, 영국 등 90여 개 국가의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유례없는 국제적 인기를 누렸다. 반면 지식인들과 언론으로부터 상업적 쓰레기 또는 미국 문화제국주의의 첨병이라는 비난도 함께 받았다.
이엔 앙 교수는 '댈러스'에 열광하는 시청자들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네덜란드 여성잡지에 광고를 낸 뒤 답신으로 받은 시청자들의 편지 42통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막장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양가적 태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다.
그중 하나는 '감정적 리얼리즘(emotional realism)'이다. 이엔 앙 교수는 부유한 상류층의 얽히고설킨 불륜 같은 비현실적인 드라마 내용을 시청자들이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비현실적 설정이지만 그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갈등과 대립, 복수, 행복, 사랑, 탐욕 등 보편적 감정에는 일체감을 형성하며 강한 현실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엔 앙 교수는 이 같은 시청자들의 정서적 일체감과 감정이입 방식에서 '감정적 리얼리즘'이란 새로운 개념으로 도출해냄으로써 드라마 시청자들의 즐거움을 이해하는 길을 열었다.
또 다른 중요한 단서는 '조롱적 시청(ironic viewing)'이다. 시청자들은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한 드라마를 볼 때 자신을 우월적 존재로 정의하고 등장인물과 이야기를 조롱하고 비꼬는 태도를 통해 드라마 시청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태도는 시청자들이 드라마 시청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그로 인한 수치심을 극복하고 드라마를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이엔 앙 교수는 드라마 시청자들을 행위성과 주체성이 결여된 익명의 군중으로 치부하는 지적 편견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책은 심심찮게 등장해 논란으로까지 번지는 한국 막장 드라마가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통찰을 준다.
누구나 만만하게 싸구려 딱지를 붙여댈 수 있는 막장 드라마는 현실에서 억눌리고 상처받은 우월감을 보상받고 싶어하는 시청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안거리로 볼 수 있다.
박지훈 옮김. 232쪽. 1만5천원.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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