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을 BH 압박카드로' 행정처 문건 발견…"사법행정권 남용"(종합)
'사법부 블랙리스트' 3차 조사결과…"상고법원 입법 위해 靑설득 구상"
판사사찰 문건 추가 발견…재판개입 문건도 일부 사실로 확인
사법부 관료화·무리한 상고법원 추진 탓…"블랙리스트는 없어"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추진을 위해 재판을 청와대와 정치권을 설득 내지 압박할 카드로 활용하려 한 사실이 내부 문건을 통해 드러나 법조계에 큰 파문이 일고 있다.
법원행정처가 재판에 개입하려거나 특정 법관을 뒷조사한 정황을 담은 문건도 추가로 발견돼 사법행정권을 남용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다만 특정 성향의 법관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기 위해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최종 결론 났다.
26일 대법원에 따르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은 전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조사 결과를 법원 내부통신망 코트넷을 통해 공지했다. 조사결과는 김명수 대법원장에게도 보고됐다.
특별조사단은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숙원사업이자 입법 과제였던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정부와 협상 전략을 모색하는 문건이 임종헌 전 차장 등 법원행정처 관계자들의 컴퓨터에서 발견됐다고 밝혔다.
조사단이 확보한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방안'과 '상고법원 관련 BH 대응 전략' 등 문건에는 상고법원 입법을 위해 박근혜 정부가 관심을 갖는 판결을 조사하고, 판결 방향까지 직접 연구한 정황이 담겼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치 관련 검토', '성완종 리스트 사건 재판 영향분석 및 대응방향', '국무총리 대국민담화의 영향 분석과 대응 방향 검토' 등 문건도 박근혜 정부가 관심을 갖는 재판을 통해 청와대와의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겠다는 구상을 담은 것으로 파악됐다.
조사단은 "박지원 의원 일부 유죄 판결,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파기환송 판결 등을 청와대에 대한 유화적 접근 소재로 이용한다는 기조를 법원행정처가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문건을 보면)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 불허의 돌출 판결이 나오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고 앞으로도 민정수석 등 청와대에 대한 설득·압박카드로 활용한다는 기조 역시 유지하고 있었다"면서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사례라고 비판했다.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이라는 문건에는 상고법원 입법이 좌절될 경우 사법부가 더 이상 청와대와 원만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명분이 없다는 점을 명확히 고지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조사단은 "임종헌 전 차장이 정부에 우호적 판결이 있도록 협력해 왔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 설령 협력·압박 카드가 실제 이뤄지지 않았어도 직접 그런 문건을 작성했다는 것만으로도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조사단은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법관들에 대한 성향, 동향, 재산관계 등을 파악한 파일이 존재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법원행정처가 법원 내 학술동호회인 국제인권법연구화 산하 소모임인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을 사찰했다는 의혹과 관련해서는 장기간 동향을 파악하고 모임을 견제·압박할 방안을 마련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국제인권법연구회가 개최하려 한 공동학술대회에 개입했다는 의혹,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후보 성향을 분석하고 추천에 개입했다는 의혹과 관련해서는 앞선 조사 때 발견하지 못한 추가 문건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비판적인 법관들에 대해 리스트를 작성하여 그들에 대하여 조직적, 체계적으로 인사상 불이익을 부과하였음을 인정할 만한 자료는 발견할 수 없었다"면서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법원행정처가 일선 법원의 재판에 개입하려 한 정황도 드러났다.
법원행정처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항소심 판결을 분석한 보고서를 상고심을 맡은 대법원의 연구관에게 건넨 것으로 파악됐다. 이 보고서가 상고심에 영향을 줬다고 보기 어렵지만 행정처의 시각이 재판부에 전달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했다고 조사단은 지적했다.
법원행정처가 박근혜 정부 시절 대법원의 통상임금 판결과 관련해 'BH(청와대)가 흡족해한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을 작성했다는 의혹도 일부 사실로 확인됐다.
조사단은 "법원행정처 컴퓨터에서 나온 문건에 '흡족'이라는 표현까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청와대가 (통상임금 판결과 관련해) 대내적으로 정부와 재계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준 것으로 평가했다고 기재돼 있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이던 임종헌 전 차장이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통해 홍경식 민정수석에 판결 취지를 설명했고, 그 과정에서 민정수석실의 대내적 평가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조사단은 "이 문건이 차한성 당시 법원행정처장에게 보고됐다는 진술도 확보했다"고 부연했다.
조사단은 또 법원행정처가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들인 판사들의 징계를 추진하려 한 정황도 파악했다.
조사단은 "(손해배상 판결을 내린 법관에 대해) 임종헌 당시 차장이 윤리감사관실 심의관에게 직무감독권 행사를 검토하게 하고 기조실 심의관에게 재차 징계여부를 검토하게 했다"며 "재판의 독립을 침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조사단은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한 원인으로 사법부의 관료화와 무리한 상고법원 추진 등을 꼽았다.
법관의 인사권을 가진 법원행정처 상층부에 의해 개별 법관의 독립이 크게 도전받게 됐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상고법원 입법화 추진 과정에서 원칙을 위배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재판 독립이 침해됐다고 분석했다.
임종헌 전 차장이 4년 7개월 동안 법원행정처에서만 근무한 점을 들어 행정처 고위간부가 장기간 근무하는 관행도 문제로 지적됐다.
조사단은 사법 관료화 방지책과 사법행정 담당자가 지켜야 할 기준이 마련돼야 하며 재판의 독립이 침해된 경우에는 시정할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번 의혹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직권남용죄 여부는 논란이 있고, 그 밖의 범죄 혐의는 인정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돼 형사상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했다"며 "행위자별로 징계권자나 인사권자에게 내용을 전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법부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 지난해부터 올해 1월까지 2차례에 걸쳐 진상조사를 벌인 바 있다. 하지만 비밀번호가 걸려 행정처 컴퓨터 속 암호 파일들을 열어보지 못한 탓에 진상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에 3차 조사를 맡은 조사단은 임종헌 전 차장과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위원, 기조실 심의관 2명 등 법원행정처 관계자 4명이 사용한 컴퓨터에서 나온 파일을 열어보기로 하고 당사자 동의를 얻어 파일을 검증했다.
조사과정에서 법원행정처가 법관 동향을 살폈다는 의혹과 관련이 있을 만한 파일 406개뿐 아니라 법원행정처가 일선 법원의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심을 부를 만한 문서가 발견돼 파일을 작성한 사람과 보고받은 사람 등을 상대로 경위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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