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다녀간 날 밤 발포명령 내려져…실탄 무장 지시받아"
광주 보안부대 수사관 허장환씨 30년 만에 다시 증언
"모든 문제는 전두환 사령관이 책임진다는 말도 들었다"
"북한군 개입설은 공신 책봉 눈먼 자들 조작 시나리오"
(화천=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1980년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나는 광주 505보안부대의 핵심 수사관이었다. 그 한복판에서 내가 바라본 광주는 공신 책봉에 눈먼 현지 지휘관이 짠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조작극이었다."
1980년 5·18 당시 광주 505보안부대 수사관으로 '전남·북 계엄분소 합동수사단 광주사태 처리수사국 국보위 특명단장'이었던 허장환(70)씨는 5·18 민주화 운동 38주년을 나흘여 앞둔 지난 15일 무거운 입을 떼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1988년 12월 6일 서울 여의도 옛 평화민주당사에서 광주사태의 사전 조작 및 발포 책임자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라는 양심선언을 한 인물이다.
양심선언 후 그는 이른바 '보안사 5·11 분석반'의 온갖 회유와 협박 등에 못 이겨 쫓기다시피 강원도 화천에서 30년째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허씨는 "정치군인들의 강압 때문에 군에서 쫓겨나 숨죽여 살아왔지만 이제는 역사 앞에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알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며 "양심선언 당시 제기한 조작 의혹 중 일부 사건은 아직도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점 등에 의구심을 품어 오다가 더는 침묵할 수 없다고 판단해 세상에 나섰다"고 강조했다.
당시 505보안부대에서 대공 간첩 업무를 담당한 허씨는 5·18 당시 폭도로 검거된 시민군들의 분류 심사는 물론 특수임무 수행 등으로 '광주사태'의 한복판에서 있었다고 밝혔다.
허씨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를 다녀간 뒤 그날 밤 자위력 구사라는 미명 하에 발포명령이 내려졌다는 말을 상관인 S 중령에게 직접 전해 듣고 실탄 무장 지시를 받았고 실제 실탄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특히 그는 "자위권 구사가 최종 결정됐다는 말과 실탄 지급은 공식적인 발포명령을 의미하며, '우리가 먼저 한 것으로 해서는 안 돼'라는 말도 이어졌다"며 "모든 문제는 (전두환) 사령관이 책임진다는 말도 S 중령에게서 나왔다"고 덧붙였다.
이뿐만 아니라 광주사태 기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505보안부대 내에서 벌어졌고, 석연치 않은 수사 종료 지시를 상급자에게서 받았다고 증언했다.
광주 시민군을 폭도와 용공으로 몰아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켜 무력 진압을 정당화하려는 조작 시나리오가 있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대표적으로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혹 중 하나인 아시아자동차 차량 탈취 사건과 최초 무기고 탈취로 기록된 나주 반남지서 사건, 녹두서점 북한 찬양 유인물 사건, 전남도청 독침 사건, 도청 옥상 북한인공기 펼침 사건 등을 나열했다.
허씨는 "방산업체인 아시아자동차 차량이 탈취당하고 반남지서 무기고가 최초로 털렸는데도 이를 중점 수사하라는 지시는 전혀 없었다"며 "일반 시민이 무기고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무기고가 탈취됐는데 책임지는 사람도 없이 수사는 이상하리만큼 흐지부지된 점에서 조작을 의심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어 "전남도청 옥상에 인공기가 펼쳐졌다는 첩보와 녹두서점 불온 유인물 첩보는 당시만 해도 당연히 대공수사를 전담하는 우리 부대가 파헤쳐야 할 사안인데도 상부에서는 오히려 수사하지 못하게 했다"며 "이는 '광주사태'를 북한군 침투와 연계시키려는 조작 시나리오라고 생각을 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5·18 관련 재판 과정에서 광주 피해자들이 조작이라고 증언한 '장○○ 독침 사건 조작'에 대해 허씨는 "전남도청 시민군 지휘본부 화장실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독침 사용이라는 점에서 '북한 간첩 침투'라는 인식을 주기 때문에 당시 수사관들 모두 깜짝 놀랐다"며 "그러나 이상하게도 상부에서는 이 사건의 수사를 제지하고 검거된 주범을 수사하는 과정에서도 오히려 두둔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허씨는 광주 상황을 격화시킨 주요 사건의 조작 당사자로 '녹화사업'의 입안자인 505보안부대 S 중령을 지목했다.
그는 "공신 책봉에 눈먼 현지 보안부대 지휘관이 모든 시나리오를 짜 '작전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보고하면 광주와 관련된 주요 결정이 보안사령부를 통해 이뤄진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보고계통은 공수여단 등 일선 부대→전남 계엄분소(31사단)→전남북 계엄분소(전투교육사령부)→2군사령부→육군본부→계엄사령부로 올라가 지휘는 그 역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는 허울뿐인 지휘계통이고 실제는 공수여단, 광주 505보안부대, 보안사를 거쳐 신군부 핵심으로 이어지는 비공식 지휘체계가 있었다는 게 허씨의 증언이다.
그는 "당시 현지의 사정을 잘 아는 S 중령이 짠 시나리오, 즉 작전 조언을 토대로 '광주사태'의 주요 결정이 내려졌지만, S 중령을 비롯한 현지 책임자들은 제대로 된 조사 한 번 받지를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505보안부대 수사관이던 자신이 1988년 양심선언까지 할 정도로 광주에서 벌어진 군 내부의 일을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허씨는 "신군부의 실세인 이학봉씨를 비롯해 허화평·허삼수씨 등과 친분이 있고 신임도 얻어 중요 임무를 수행한 바 있었기 때문에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런 그에게도 시련은 닥쳐왔다.
허씨는 "광주민주화운동의 거목인 홍남순 변호사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서 재야 수괴로 넘겨졌는데, 행적을 조작해 재수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했다가 항명 행위라는 이유로 그해 9월 강제 전역당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허씨는 자신의 강제 전역의 이면에는 '많은 사람을 희생하면서까지 정권을 찬탈해야 하는가'라고 한 말이 감찰을 통해 신군부 흘러들어 갔기 때문으로 믿고 있다.
게다가 그가 틈나는 대로 당시 광주의 실상을 자필로 기록한 문서가 중앙정보부에 흘러들어 간 것도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증언했다.
이 일로 그는 보안사 수사분실, 이른바 '서빙고호텔'에 끌려가 18일간 모든 고문을 당했다고 전했다.
당시 악명 높았든 보안사 수사관이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홍남순 변호사 행적 조작에 대한 항명, 강제 전역, 1988년 양심선언 등으로 2013년 10월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됐다.
허씨는 "지금이라도 신군부의 공신 책봉에 눈이 멀어 왜곡·조작한 현지 지휘관 등을 조사해야 한다"며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광주의 역사를 올바른 선반에 올려놓기 위한 유일한 길은 전두환 전 보안사령관을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소해 국제적으로 학살범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그는 홍남순 변호사 기념사업회와 함께 1천만인 서명운동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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