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혁명 50주년]①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68의 발단
파리 근교 낭테르대의 베트남전·대학교육 비판 학교 점거시위 발단
드골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저항…학생시위, 총파업과 결합해 폭발
68년 4∼5월 대규모 바리케이드 집회, 프랑스 전복 직전까지 흔들려
[※ 편집자 주 = 프랑스에서 시작된 68년 5월 학생혁명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1968년 3∼5월. 프랑스 청년들이 노동자들과 함께 기성세대와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저항해 프랑스를 뿌리 끝까지 뒤흔든 '68'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의 변혁운동에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펼쳐진 '68'의 발단과 전개, 현재에 주는 의미 등을 4편의 파리 특파원 기사를 통해 살펴봅니다.]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1968년 3월 22일 프랑스 파리 근교의 낭테르 대학.
전날 이 대학 학생 6명이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전에 항의해 성조기를 불태운 혐의로 체포되자 학생운동을 이끌던 다니엘 콘벤디트(당시 23세)는 강의실을 돌며 분노한 학생들을 규합했다.
대학본부를 점거한 학생들은 체포된 친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베트남전 반대, 자본주의와 기술관료주의에 젖은 대학교육 비판, 권위주의적 구질서 타파 등의 내용을 담은 선언서를 발표한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 점거시위가 앞으로 두 달간 프랑스를 전복 직전까지 뒤흔든 이른바 '68년 5월 학생혁명'의 서막이 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화염병과 최루가스로 뒤덮인 파리…보수적인 시민들도 가세
낭테르대가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운동 지도부의 징계를 발표한 것이 도화선이 돼 학생시위는 다른 대학들로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5월 3일에는 500명의 학생이 소르본대에서 집회를 열었고, '빨갱이 대니'(Dany le rouge)라는 별명의 콘벤디트의 연설에 열광한 학생들은 캠퍼스에 진입한 경찰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거리의 차량에 불을 질렀다.
6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연행됐지만, 경찰의 진압은 기폭제가 됐다. 이때부터 소수의 전위 위주의 학생운동은 대중운동으로 급격히 퍼져나간다.
파리의 중산층인 5구와 6구에 거주하는 시민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무장경찰이 학생들을 때리는 장면이 TV로 생중계되면서 보수적인 시민들도 정부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파리의 5월은 온통 최루가스와 화염병, 구호들로 뒤덮였다.
5월 10일의 대규모 집회에서 시위대가 대규모로 연행되고 차량 수백 대가 불에 탔지만, 시위 뒤 바리케이드 안의 밤은 엄숙하기보다는 축제에 가까웠다.
젊은이들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Il est interdit d'interdire) 등의 구호를 외치며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과 사랑을 노래하고 성적 자기결정권과 표현의 자유를 역설했다.
다음날에는 노동자들이 결합했다. 프랑스 양대 노조인 노동총동맹(CGT)과 민주노동연맹(CFDT)이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학생들과 연대하겠다면서 동맹 총파업을 선언한 것.
젊은이들 특유의 급진적 변혁의 열망은 노동자들의 강력한 조직력과 결합하면서 순식간에 프랑스 전체를 들끓게 했다.
세를 불린 학생과 노동자들은 샤를 드골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적인 기성 권력에 저항하며 연일 대규모 거리 집회를 조직했고, 4∼5월의 프랑스 사회는 그야말로 뿌리째 흔들렸다.
이것이 바로 향후 수십 년간 서구는 물론 세계 전반의 문화와 사회, 정치지형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68운동의 발단이다.
◇프랑스 전후 대학교육의 부조리 응축·폭발…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저항
68운동은 왜 대학에서 시작했을까.
2차대전 직후 10만 명도 채 되지 않던 프랑스의 대학생 수는 베이비붐 세대성장으로 60년대 말에는 65만이 넘어섰고, 이 과정에서 교원 부족, 대형 강의 위주의 암기·주입식 교육, 교수들의 권위주의 등 다양한 문제가 응축됐다.
그런 와중에 기숙사 통금과 남학생들의 여자 기숙사 방문 금지 규정 등 당시 일견 사소해 보이기도 한 일상의 억압들이 자유를 갈망하던 학생들의 분노에 불을 댕겼다.
특히 68의 발단이 됐던 낭테르대는 빈민촌으로 둘러싸인 열악한 교육환경 탓에 학생들의 저항심리를 더욱 부추겼다.
세대갈등도 빼놓을 수 없는 원인이다.
68세대의 부모들은 대부분 1910∼1915년 태어나 1차대전에서 부모를 잃고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경제위기를 견뎌냈지만, 2차대전이 터지면서 수없이 많은 동년배가 처참히 죽는 것을 목도하고, 나치와 부역정권인 비시정부 치하에서 숨죽이며 생존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프랑스가 해방된 뒤에는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래서 그 어떤 세대들보다 '프랑스를 내손으로 다시 일궜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이른바 '영광의 30년'(Les Trente Glorieuses·1945~1975) 시기 프랑스 가계 소비는 한 세대에 2.7배나 증가할 만큼 이들은 성장의 달콤한 과실을 소비자본주의로 맛본 세대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들은 대학생 자녀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반항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물질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자본주의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고 여겼고, 물질적 풍요보다는 권위주의 타파, 정신적 자유를 갈망했다.
이런 세대갈등과 긴밀히 맞물린 것은 바로 기성정치에 대한 환멸이다.
1968년은 1·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던 샤를 드골이 1958년 제5공화국을 세운지 10년이 지난 시점이다. "10년으로 이제 충분하다"는 유명한 구호에서 볼 수 있듯이, 청년들은 드골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질서를 끌어내리려 했다.
드골은 위대한 프랑스의 재건을 내걸고 경제성장을 이끄는 한편, 전후 강대국들 사이에서 프랑스의 위상을 독보적으로 높인 거물이었지만, 그의 집권 기간 사회는 전반적인 보수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대통령에게 권한이 지나치게 집중되고 의회가 대통령의 카리스마에 짓눌리면서 의회 민주주의의 위기가 부각됐다.
이런 가운데 1960년대 후반 실업률 증가 지역 간 불균형, 외국인 저임금 노동자 문제 등 경제문제 역시 권력에 대한 저항심리에 기름을 붓는 요인이 됐다.
yonglae@yna.co.kr
※참고한 자료: 이성재 '68운동'(책세상·2009년), 김복래 '프랑스사'(미래엔·2005년), Henri del Pup 외 'Histoire de la France'(Milan), 르몽드 등 프랑스 언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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