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의 시선] 100년 전 임시정부의 염원
(서울=연합뉴스) "삼천만 민족의 총의로 조국애에 타오르는 의열사(義烈士)가 중심되어 조직된 우리 임시정부의 개선을 환영하는 민족적 성전(盛典)이 십구일 오전 열 시에 서울그라운드에서 개최되었다…십일시 정각이 가까워오자 김구 주석 이하 요인 일동의 입장에 뒤이어서 각 정당 대표 기타 인사의 입장이 있었고 대비되었던 장엄한 취주악에 맞추어 일동 총 기립으로 역사적 성전이 개막되었다. 일동은 북향하여 삼십육 년간 잊었던 우리의 태극 국기를 올렸다. 깃발은 서서히 창공을 향하여 나부꼈고 엄숙한 장내는 희비의 교류곡이 소리 없이 흘렀다. 일동의 애국가 합창 이화여전의 환영가 합창이 끝난 후 홍명희 씨의 환영이 있었고 러취 군정장관의 축사와 김구 주석의 열렬한 답사 이승만 씨의 답사가 있은 후 천지를 진감 하는 만세삼창으로 환영회는 폐회되었다." ('전 민족의 환호 충천' 동아일보 1945. 12. 20)
1945년 12월 19일, 해방된 지 넉 달이 지나서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환영식이 열렸다.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그 자리에 선 임시정부 요인들과 이들을 지켜보는 참석자들 모두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오는 13일은 정부가 정한 임시정부수립일이다.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해서 국권을 되찾고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다. 내년이면 세워진 지 정확히 100년이 된다.
당시 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외교활동이 활발했으며 쑨원이 이끄는 중화혁명당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많은 애국지사가 모여들었다. 3·1 운동 직후 일제 통치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들은 1919년 4월 11일 프랑스 조계에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다.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 10개 조를 채택했다. 이틀 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했다.
임시의정원 의장에 이동녕, 행정부인 국무원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으로 출범했다.
3.1운동 이후 총 7개의 임시정부가 국내외에 세워졌다. 그러나 상하이임시정부와 서울에서 결성된 한성임시정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된 노령임시정부를 제외하고 4개는 전단으로만 수립 사실이 알려졌을 뿐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4월 13일 한성임시정부와, 9월 6일 노령임시정부와 각각 통합했다.
임시정부는 9월 11일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을 개편했다. 1926년 9월 임시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원제를 채택했으며, 이후 의원내각제가 정부형태의 주류를 이루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임시정부는 해방될 때까지 상하이(1919),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저우(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충칭(1940) 등지로 청사를 옮겨 다녔다.
임시정부는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국내와의 비밀연락망 조직인 연통부와 통신담당 기관인 교통국을 두었다. 또 상하이 등에 동포 자치조직인 거류민단을 설치했다. 구급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했으나 늘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렸다. 초기 재정의 대부분은 재미교포들의 성금으로 유지됐고 후에 장제스의 원조금도 큰 몫을 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했으며 기관지 독립신문, 신대한보, 신한청년보, 공보 등을 발행해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임시정부 소식을 알렸다.
1919년 4월 18일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견했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소앙을 보내 한국독립승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0년 10월 쑨원이 광둥에 설립한 호법정부에 당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신규식을 대표로 파견, 임시정부를 승인받았다. 또한, 한국 유학생을 중국군관학교에 받아들이며, 조차지를 허용하여 한국독립군을 양성할 것 등의 약속을 받아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결의되자 1944년 프랑스, 폴란드, 구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했다.
임시정부 초기의 무장 독립투쟁은 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을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나 김구가 1931년 10월 한인애국단을 결성한 이후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로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일왕 폭살기도는 미수로 그쳤으나,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 홍구공원사건으로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이 사망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정부와의 관계가 친밀해지면서 1933년 중국 중앙군관학교 뤼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돼 만주의 독립군을 입교시켜 교육을 받게 했다.
임시정부는 충칭 시기였던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12월 일본에 선전포고했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 사이판, 필리핀 등지에 병력을 파견했다. 광복군의 작전권은 중국 국민당에 있었으나 1944년 8월 임시정부로 이관,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펼칠 수 있게 됐다. 1945년에는 국내 정진대를 편성해 OSS(미국전략사무국) 부대와 합동으로 국내 진격작전을 추진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1989년에 4월 13일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로 정하고, 이듬해부터 매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일을 4월 11일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임시정부는 1937년 처음으로 정부수립 기념식을 열었는데, 임시정부의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에 "4월 11일이 임시헌장을 발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성립한 기념일"이라고 기록돼 있다. 반면 13일로 주장하는 측은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 경찰 등이 대한교민단 사무소에서 압수한 문서를 편집해 펴낸 '조선민족운동연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내년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올해 정부 차원에서 다양한 기념사업이 추진된다. 특히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인근 서대문구 의회청사 자리에 2021년 준공을 목표로 임시정부기념관이 건립된다.
충칭에서 광복 소식을 접한 임시정부 지도부는 즉시 귀국 준비에 들어갔다. 1945년 9월 3일 국무회의 명의로 '당면정책 14개 조'를 발표, 임정 입국→각계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수립→전국 보통선거 실시→정부 수립 등의 정부출범 방안을 제시했다. 임시정부 측은 정통성을 주장하며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하기를 원했으나 미 군정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지도부는 11월 29일 개인 자격으로 들어왔으며, 내각과 정책도 계승되지 못했다.
그러나 신생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라고 하여 임시정부가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기반이 됐음을 분명히 했다.
임시정부는 이념 갈등과 분열이 극심했다. 좀 더 통일된 지도부가 운영됐더라면 독립운동은 훨씬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진행됐을 것이다. 아쉬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해방될 때까지 27년간 정부조직을 유지하며 중국 각처에서 투쟁했다. 국내에서 일제의 억압에 허덕이던 백성들, 이역만리에서 망향의 설움 속에 신산한 삶을 영위하던 해외동포들은 머나먼 중국 땅 어딘가에 우리의 임시정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 초라한 골목에서 조국 해방의 염원을 품고 모여들었던 애국지사들, 멀리 미국 본토와 하와이, 남미 등지에서 고달픈 노동으로 벌어들인 피땀 어린 성금을 보낸 해외동포들, 목숨 걸고 독립 자금을 보탠 만주와 국내의 항일조직들… 정치적, 사회적으로 갈등과 혼란이 심한 지금, 임시정부 설립 100년을 앞두고 그들의 초심을 되돌아볼 때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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