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목사 암살 50주기 '분단' 독일의 특별한 기억…"우린 하나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 "그리스도 안에선 동도 없고 서도 없으며 북도 남도 없습니다. 온 누리에 가득한 하나의 위대한 사랑의 유대감이 있을 뿐입니다."
흑인 인권운동 목사 마틴 루서 킹(주니어)은 1964년 9월 12일부터 사흘간, 분단된 독일 베를린을 찾아 이같이 설교하며 분단 극복의 메시지를 강조했다고 독일 공영 국제방송 도이체벨레가 3일(현지시간) 전했다.
킹 목사의 당시 방문은 같은 침례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과거 베를린 방문 인연을 떠올려 더 각별했다. 본명이 '마이클 킹'인 부친은 나치 집권기이던 1934년 독일 침례교 100주년 기념차 베를린을 찾았고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좇아 마틴 루서 킹(시니어)으로 개명했다.
부친 방문 이후 꼭 30년 만에 킹 목사가 찾은 베를린은 동독이 쌓아 올린 베를린장벽으로 대표되는 세계 냉전의 상징 도시였다. 특히 동독 영역에 자리 잡고 있지만 다시 동, 서베를린으로 나뉜 채 동독과 서독 진영 아래 각기 묶여 있는 이중의 분단 도시였다.
그러나 차별 철폐에 앞장선 시민불복종 운동가였던 킹 목사에겐 냉전도, 분단도, 베를린장벽도 인정하기 어려운 장애에 불과했다.
그는 동, 서베를린을 모두 방문해 수 많은 청중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이곳 베를린장벽의 이쪽이나 저쪽이나 어디든 하느님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장벽이 그 사실을 없애버릴 순 없는 것입니다."
도이체벨레는 당시 동, 서독은 킹 목사의 이런 메시지를 저마다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하고 이용했다고 평가했다.
프라이부르크대의 지크린데 렘케 북미연구소 교수는 "서독인들은 아버지 세대의 나치 전통 대신 (미국의) 히피, 저항, 시민불복종 문화와 연결되길 기대했다"고 킹 목사를 희구하는 서독인들의 정향을 해설했다.
동독인들은 또한 젊은층을 중심으로 킹 목사의 저항과 미 당국의 탄압을 1953년 자신들의 공산정권에 맞선 노동자 저항과 탄압에 빗대며 같은 정서를 느꼈다는 것이 전문가의 진단이다.
도이체벨레는 킹 목사는 이뿐 아니라 민주주의 운동가로서 전 세계에 영감을 제공했다면서 그가 암살된 1968년(4월 4일) 후반기에 있었던 체코 민주화 운동 '프라하의 봄'을 그런 사례의 하나로 거론했다.
또 그런 킹 목사를 기리는 다양한 움직임이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다면서 한때 옛 소련 레닌의 거대한 동상이 있었던 베를린 동쪽 지역의 한 광장에 킹 목사의 기념시설을 들이고 그의 동상을 아울러 세우려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킹 목사 기념관 건립을 주도하는 미하엘 슐츠는 "독재자(레닌)에서 평화인(킹 목사)으로"라고 이 운동의 특징을 규정했다고 도이체벨레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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