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속 빛나는 풍자…커트 보니것 소설집
'세상이 잠든 동안'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작가들이 사랑하는 작가 커트 보니것(1922∼2007)의 초기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 '세상이 잠든 동안'(문학동네)이 번역 출간됐다.
출판사는 이 책을 "보니것의 미발표 초기 단편소설 중에서도 보니것식 휴머니즘의 시원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별해 묶었다"고 설명했다.
보니것은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징집돼 독일 드레스덴에서 대량 살상을 목격하는 등 흔치 않은 경험을 하고 이후 미국에서는 경제가 최고의 호황을 누리며 사람들이 돈을 향한 욕망에만 매몰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 시기에 쓴 소설들에서 보니것은 현대인의 세속적인 욕망을 풍자하면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 휴머니즘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 수록된 16편의 이야기 중 첫 번째인 '제니'는 불완전한 인간이 추구하는 불완전한 사랑의 속성을 이야기한다. 로봇이라고 할 수 있는 유사 인간을 등장시켜 다가올 미래 사회를 예견하는 듯한 혜안까지 담고 있다.
뛰어난 공학자인 '조지'는 전자회사 연구소에서 일하다 홍보용으로 쓸 특별한 냉장고를 발명한다. '제니'라는 이름의 이 냉장고는 예쁜 여성의 얼굴과 몸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세밀한 무선 조작을 통해 사람처럼 말을 하고 표정을 짓도록 작동된다. 조지는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이 제니를 만들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제니와 사랑에 빠져 아내와 이혼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고 전자회사 직원인 '나'는 조지의 전처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조지에게 전하라는 회사의 지시를 받고, 제니와 함께 전국을 돌며 냉장고를 판매하는 조지를 만나러 간다. 조지는 전처의 소식을 듣고도 제니와 장비를 실은 트럭을 떠날 수 없다며 트럭을 몰고 수천 킬로를 운전해 전처의 집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나'는 조지의 예전 친구이자 전처의 현재 남편에게서 조지가 전처를 떠나게 된 이유를 듣는다. 조지는 사랑이 완전무결해야 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결혼 이후 마주하게 된 아내의 결점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게 완벽한 사랑의 상대는 자기가 원하는 말만 아름답게 해주는 냉장고 제니가 된다.
그렇게 떠난 남편에게 전처는 죽어가며 이런 말을 남긴다.
"한때 신이 당신에게 사랑하라고 주셨던 불완전한 사람을 봐줘요. (중략) 그리고 여보, 제발, 다시 불완전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사람이 되어줘요." (38∼39쪽)
다른 수록작 '유행병'은 부를 쌓고 높은 자리에 오른 남자들이 가족에게 화려한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데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풍자한다. 과시 욕구로 가득찬 이들은 계속 위만 쳐다보며 자신이 내리막을 걷게될 가능성을 죽기보다 두려워한다.
"난 저 사람 같은 미국인들이 전부 어떻게 될지 궁금했소. 자기 인생이 가족을 점점 더 부자로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건 인생이 아니라고 믿는, 이 똑똑하고 빛나는 새 인류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단 말이오. 만약 다시 불경기가 찾아온다면 그들이 어떻게 될까", "한 가지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오, 올라갈 줄만 아는 사람들."
이원열 옮김. 400쪽. 1만5천800원.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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