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개성상인의 중국 견문록…신간 '중유일기'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바람 불어 물결이 호수를 가로지르고/ 긴 둑의 버들 가늘어 꾀꼬리도 앉지 못하네/ 그림배에 탄 기녀들은 혀를 꼬면서/ 때때로 두세 가락 노래를 주고받았네"
중국의 명승이라는 서호(西湖)를 보고 한 문인이 쓴 시다. 작자는 개성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인삼 장사를 했던 공성학(1879∼1957). 그는 1923년 생애 처음으로 중국을 43일간 여행한 뒤 일기체 형식의 기행문인 '중유일기'(中遊日記)를 집필했다.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펴낸 신간 '중유일기'는 한문으로 기록된 원문을 박동욱 한양대 교수와 이은주 서울대 교수가 번역한 책이다.
중유일기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어떻게 여행하고 세상을 인식했는가를 알려주는 자료다. 지금까지 중유일기의 내용 일부가 논문 등을 통해 소개된 적은 있지만, 전문을 우리말로 옮긴 것은 처음이다.
저자인 공성학은 경계선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개성에서 태어나 민족자본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식민통치에 협조한 친일파였다. 또 그의 본관은 중국 취푸(曲阜)였고, 상인이면서도 문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역자들은 중유일기에서도 공성학이 복잡한 감정을 드러냈다고 지적한다. 그가 공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본의 시선으로 중국의 낙후성을 발견하고, 한편으로는 일본과 서구 열강에 둘러싸인 중국의 현실에서 동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중유일기에서 확인되는 또 다른 특징은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비슷한 구절이 많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역자들은 "현재는 물론 과거의 관점에서도 표절"이라며 "이러한 문장 중복을 전근대 시기 여행기의 관습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공성학의 의도적 선택이라고 봐야 하는지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번역본에는 도판과 표가 풍부하게 실렸고, 책 뒤쪽에 원문이 수록됐다. 개성에서 출발해 일본 규슈(九州)를 거쳐 중국 상하이(上海)부터 단둥(丹東)까지의 여정을 표시한 지도도 볼 수 있다. 336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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