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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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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의 꿈

(서울=연합뉴스) "우리 주위에 허다히 있는 소재 '미망인'을 이처럼 극적 통일성을 가지고 간결하게 구성하였음은 극작을 담당한 이보라 씨와 극작 전창근 씨의 노고라 하겠으며 여성감독이 아니면 착안하기 어려운 '앵글'의 각도와 사건의 '템포,' '리듬'의 명쾌, 화면과 동작(연기) 등에 생활감정을 예리하게 융화하여 퍽 친근감을 자아냈다." (동아일보 1955. 2. 27. '미망인 여감독 박남옥 작')
1955년 개봉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감독의 영화 '미망인'에 대한 신문 소개 기사이다. 박남옥이라는 32세 여성이 치마저고리에 고무신 신고 젖먹이 등에 업고 스태프들 밥 해먹이며 메가폰을 잡았다. 이 영화는 아쉽게도 흥행에 실패, 개봉한 지 나흘 만에 간판을 내렸다. '최초의 여성감독 영화'라는 홍보 문구는 흥행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여성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영화계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영화를 만들어낸 박남옥의 열정은 기억할 만하다.



박남옥은 95년 전 1923년 2월 24일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서 출생했다. 경북여고 재학 시 베를린 올림픽 기록영화 '민족의 제전'과 '미(美)의 제전'을 보고 영화에 대한 꿈을 품었다. 체육에도 소질을 보여 여고 시절 전조육상선수권대회(전국체전)에서 여자 포환던지기 종목에 출전하여 1위를 차지하며 3회 연속 한국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집안의 반대로 체육을 전공하지 못하고 1943년 이화여전 가사과에 입학했으나 집에서 결혼을 강요하자 이듬해 중퇴했다. 미술을 배우기 위해 도쿄로 유학을 가려고 밀항선을 탔다가 배가 좌초되어 일본의 수용소에 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이후 대구매일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영화평을 썼다.
해방 직후 서울로 올라와 윤용규 감독의 소개로 조선영화사 광희동 촬영소에서 편집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일을 시작했다. 1947년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에 스크립터로 촬영 현장에 뛰어들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촬영대에 입대해 뉴스촬영반에서 활동했다.
1953년 부산에서 극작가 이보라와 결혼했다. 1954년 6월 딸을 출산하고 출산 직후인 1954년 7월부터 남편이 쓴 시나리오로 '미망인' 촬영에 들어갔다.
언니에게 돈을 빌려 제작비를 마련하고, 갓난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등에 업고, 한 손엔 영화 장비, 한 손엔 기저귀 가방을 든 채 전국 각지를 돌며 촬영 현장을 지휘했다. 아침이면 손수 장을 봐서 스태프들의 밥을 지어 먹였다.
그는 후에 "한 살짜리 딸을 업고 30여 명 스태프를 인솔해 일하자니 아기 낳기보다 어렵게 만든 영화였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추운 겨울 빈집에서 필름을 편집하다 아이가 폐렴 직전까지 가기도 했으며, 녹음실 직원들로부터 "연초부터 여자 작품을 녹음할 수 없다"며 문전박대당하기도 했다.



이민자, 이택균, 나애심, 최남현 등이 출연한 '미망인'은 16㎜ 흑백 장편으로 제작됐다. 원제는 '과부의 눈물'이었다. 한국전쟁 중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살아가는 주인공이 젊은 청년과 사랑에 빠지면서 겪는 갈등을 그린 영화로, 당시 전쟁미망인 문제를 여성의 시각으로 다루었다. 전쟁으로 아내, 어머니라는 위치가 흔들리게 된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느냐는 문제에 초점을 두었다. 여성이 처한 곤궁한 현실 속에서 남자에게 상처받기보다는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사색할 줄 아는 여성을 그렸다.
이 영화는 1955년 3월 말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봉됐으나 흥행에 성공하지 못해 박남옥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렸다. 흥행에 실패하고 이혼을 한 여성감독에게 두 번째 영화를 연출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영화계에서 잊혔던 박남옥은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를 계기로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으로 재조명됐다. 1997년 4월 11일 개막된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의 개막 초청작으로 '미망인'이 상영됐다. 영화제 집행위원회가 영화 연표를 뒤져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영화를 찾아냈으며,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던 네거티브 필름을 복원하여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마지막 결론 부분의 필름 롤은 빠져있고, 남아있는 필름 중에도 후반 10분은 사운드가 없는 불완전한 상태였다.
박남옥은 1957년 동아출판사에 들어가 관리과장으로 23년간 재직했다. 1959년 월간 영화잡지 '씨네마·팬'을 창간하기도 했다. 미국에 유학 중인 딸을 따라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2017년 4월 8일 94세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했다.
2001년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은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를 통해 박남옥의 영화 인생을 조명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3년여에 걸쳐 박남옥이 쓴 자필 원고를 외동딸이 보관해 오다가 정리작업을 거쳐 지난해 10월 자서전 '박남옥'이 출간되기도 했다.



박남옥에 이어 두 번째 여성감독은 조감독 출신 홍은원이다. 1946년 고려영화사에 들어가 1948년 최인규 감독의 '죄 없는 죄인'을 시작으로 11년간 스크립터로 일하다가 '조춘,' '사랑의 십자가' 등에서 4년 동안 조감독을 맡았다. 그의 첫 감독 작품은 1962년 7월 2일 개봉된 '여판사'이다. '여판사'는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최초의 여판사 황윤석의 죽음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홍은원에 이어 영화배우 최은희가 1965년 '민며느리' 감독에 나서 세 번째 여성감독이 됐다. 1970년 황혜미가 '첫 경험'을 감독한 이후 15년만인 1984년 10월 다섯 번째 여성감독으로 이미례가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을 내놓았다.
지난해 6월 2일 개막된 제19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9년 만에 '박남옥 영화상'을 부활, 장편 극영화 신인 여성감독을 대상으로 매년 시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남옥 영화상'은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을 제작한 후배 임순례 감독을 격려하기 위해 박남옥이 사비를 기부해 2008년 한차례 수여됐다. 그러나 재정 문제 등으로 이후에는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부활한 '박남옥 영화상' 수상자로는 '궁녀'(2007)의 김미정 감독이 선정됐다.



박남옥 당시와 비교하면 오늘날에는 많은 여성 영화인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성과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여성감독이 참여한 한국 상업영화는 연평균 5편(6.8%)에 불과하다. 총제작비 10억 원 이상이거나 최대 스크린 수 100개 이상인 상업영화를 대상으로 한 조사이다.
여성이 주연을 맡은 영화는 지난 5년간 77편으로, 약 24%를 차지했다. 여성 제작자가 참여한 상업영화는 연평균 16.2편(22.2%), 여성 작가가 참여한 상업영화는 22편(30.1%)이었다. 여성 촬영감독이 참여한 영화는 연평균 2.4편(3.29%)에 그쳤다.
험난한 시절 많은 여성 영화인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살아생전 박남옥의 소원은 두 번째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비록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그의 생전에 그의 작품이 세상에 드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감독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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