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에서 폴란드 역할을 둘러싼 역사의 진실은?
(서울=연합뉴스) 유영준 기자= "역사 서술이 정치인들에 의해 통제돼서는 안 된다".
폴란드 우익정부가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와 폴란드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법안을 제정하면서 그동안 우호적이었던 폴란드와 이스라엘 간 관계가 급속히 악화하고 있다.
문제의 법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한 뒤 설치한 강제수용소 등을 부를 때 '폴란드의(polish)'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폴란드의' 수용소라고 호칭할 경우 국적을 막론하고 벌금 또는 최대 징역 3년에 처하도록 했다.
폴란드 역시 나치 독일 점령의 피해자이며 일부 폴란드인들의 나치에 대한 부역은 생존적 차원의 불가피한 수동적 협력이라는 주장을 바탕에 깔고 있다.
홀로코스트 당시 폴란드 역할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박물관의 역사가인 에드나 프리드베르그는 6일 시사지 애틀랜틱 기고를 통해 역사의 평가는 역사가에 맡겨둬야 하며 정치인들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폴란드 우익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홀로코스트 관련 부정법이나 이에 맞서 이스라엘 측이 추진 중인 '폴란드 관련 축소 처벌법' 모두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홀로코스트와 최악의 나치 독일 점령상황을 겪은 폴란드 측의 복잡 미묘한 역사적 상황에 이해를 나타내면서도 정치인들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을 주도하고 나선 데 우려를 나타냈다.
역사 기술이 해석과 이념적 기반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지만 정치인들의 통제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난 2012년 폴란드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당시 '폴란드의 죽음의 수용소'라고 언급했다 황급히 사과했다.
프리드베르그도 '폴란드의 수용소'는 수용소가 나치에 의해 건설된 역사적 배경을 왜곡하는 것으로 부정확한 호칭이라고 지적했다. 나치 점령 중 저질러진 범죄와 기독교도 폴란드인들 관계를 일률적으로 공범 관계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런 관계도 없어 폴란드인은 무고하다고 주장하기도 모호하다는 논지이다.
폴란드 역시 나치 독일 침략의 최대 희생자 가운데 한 당사자로 나치의 가장 잔혹한 점령 체제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 나치에 의한 가혹한 벌칙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도운 폴란드인들이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더 많았던 게 사실이다.
반면 폴란드인 상당수는 독일을 도와 유대인 절멸 계획을 가능케 한 것도 역사적 사실이라고 프리드베르그는 지적했다.
2차 대전 발발 이전 이미 폴란드 사회 내에 반유대주의가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1차 대전 이후 출범한 근대 폴란드는 1920-30년대를 거치면서 이념적 기반과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고 가톨릭에 뿌리를 둔 민족주의가 그 핵심 기반이었다.
홀로코스트 발발 직전 유대인들은 폴란드 전체 인구의 약 10%를 차지하고 수도 바르샤바의 경우 전체 시민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커지는 유대인들이 영향력을 우려한 일부 정치인들은 유대인들의 대량 이주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폴란드는 2차 대전을 맞이하게 됐고 소련과 나치의 분할 점령을 거쳐 나치 점령하로 들어갔다.
나치는 폴란드인을 인종적으로 열악한 민족으로 것으로 간주했고 의도적으로 폴란드 지도부 말소에 나섰다. 가톨릭 사제와 지식인, 교사, 정치지도자 등 수만 명을 살해했다. 지도부를 말살해 있을지도 모를 봉기의 싹을 자르려는 시도였다.
150만 명의 폴란드인들이 전시 군수산업 노동자로 징발돼 독일로 강제 이송됐고 다른 수십만 명은 수용소에 투옥됐다.
모두 약 200만 명의 비(非)유대계 폴란드 민간 또는 군인들이 2차 대전 기간 사망했다.
나치가 대규모 유대인 말살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폴란드 경찰과 철도 요원들이 동원됐다. 특히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음의 수용소행을 기다리며 억류된 게토 지구 경비에도 이들이 동원됐다.
나치는 이들 목적으로 폴란드 경찰을 재조직했으며 '블루 폴리스'(blue police)로 불린 이들 규모는 약 2만 명이었다. 1942-43년간 벌어진 나치의 게토 '청소' 작전에도 이들이 참여했다.
역설적이게도 나치의 유대인 사냥을 도운 이들 폴란드 경찰 가운데 일부는 나치 점령군에 대항하던 폴란드 지하저항군(레지스탕스)의 일원이기도 했다.
일부 폴란드인들은 유대인 재산이 탐나 숨어있는 유대인들을 고발하고 이들을 식별하는 데 도움을 제공하기도 했다. 유대인 가족을 협박해 돈을 갈취하기도 했다. 반유대 감정이 팽배한 일부 지방에서는 주민들이 유대인들을 집단 살해하기도 했다. 1941년 여름 에드바브네라는 마을에선 수백 명의 유대인이 마을 주민들에 의해 산채로 화장되기도 했다.
반면 그니에프시나라는 마을에서는 기독교계 주민들이 유대인을 보호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충하는 다양한 사례들로 인해 혼란했던 나치 점령 기간 폴란드가 과연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런던으로 피신한 폴란드 망명정부는 유대인 보호를 포함한 국내 반나치 저항활동을 후원했으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프랭클린 루스벨트 등 서방 지도자들에 처음으로 알린 증인 가운데 한 명은 당시 국내 저항세력과 런던 망명정부를 오가던 연락책인 얀 카르스키였다.
또 제고타(유대인지원위원회)라는 비밀조직은 위조증명서를 제공해 수천 명을 구했으며 은폐장소와 탈출로를 제공하는 등 폴란드인들이 유대인을 도운 에피소드는 다양하다.
그러나 전쟁종식까지 300만 명의 폴란드 유대인들이 나치와 다양한 민족 출신의 협력자들에 의해 처형됨으로써 폴란드인들의 지원 노력은 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폴란드 측에서는 자칫 나치에 의해 똑같이 처벌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은 것이 가해자로 매도당할 근거인지에 대해서도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나치 점령하 폴란드 상황은 공포와 탐욕, 동정, 기회주의, 반유대주의 같은 증오 등 인간 행동의 모든 양태가 드러난 것이라는 불가피한 상황 논리도 있다.
프리드베르그는 홀로코스트와 나치 점령하 폴란드 관계가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힘든 복잡한 관계임을 인정하면서도 폴란드 정부가 정치적 입법으로 먼저 사단을 제공한 데 우려를 나타냈다.
아울러 이스라엘 정부가 이에 맞서 보복법안을 마련 중인데도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면서 폴란드 측이 위헌 여부 등 마지막 단계에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줄 것을 기대했다.
2차 대전에 대한 마지막 증인들이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폴란드의 조치는 자국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중대한 선례가 될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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