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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쉰들러'는 왜 역사 속에서 잊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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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쉰들러'는 왜 역사 속에서 잊혔을까
헝가리에서 6만2천명 유대인 구한 루츠…'중립' 정책 어겼다 질책받아

(제네바=연합뉴스) 이광철 특파원 = 제2차 세계대전의 잔혹함이 극에 이르렀던 1942년 카를 루츠는 헝가리주재 스위스 부영사로 부임한다.
헝가리는 이미 1941년 독일 편에 서서 참전했고 나치 독일은 3년 뒤 헝가리를 점령하게 된다.
헝가리를 점령한 나치는 부다페스트를 중심으로 유대인들을 색출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인 샤럿 샬리는 4일 영국 BBC 인터뷰에서 "루츠는 서둘러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는 걸 깨닫게 된다"면서 그가 했던 일이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에서 구한 독일인 오스카 쉰들러의 행동과 비교할만하다고 평가했다.



미국, 영국이 부다페스트 대사관을 폐쇄하면서 중립국 스위스의 외교관인 루츠는 이들 나라의 국민까지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나치 당국을 설득해 8천 명에게 여권을 발행해줄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루츠는 나치의 눈을 피해 8천 명 개인이 아닌 8천 명의 가족에게 여권을 발급해주었다. 그는 또 7천999명의 가족에게 여권을 발급해준 뒤 다시 1번부터 번호를 매기는 식으로 다시 여권을 내줬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루츠가 살려낸 유대인들이 6만2천여 명에 이를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7만 명에 이르는 헝가리 유대인들을 구한 헝가리 주재 스웨덴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도 루츠에게서 배운 방법으로 비자를 내줬다.
패색이 짙어진 나치는 다뉴브 강가에서 마구잡이로 유대인들을 총살하게 되는데 루츠는 부다페스트 내 스위스 정부가 소유한 땅에 안가 76채를 만들고 유대인들을 숨겨줬다.
스웨덴과 적십자도 120여 개의 안가를 만들어 유대인들을 구했다.



전쟁이 끝나고 스위스로 돌아온 루츠를 기다린 건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루츠는 1975년 사망 전 인터뷰에서 "국경을 넘어설 때 아무도 없었다는 건 매우 실망스러웠다"며 "세관에서 신고할 게 있느냐는 질문만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했다는 찬사 대신 월권을 했다며 정부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역사학자 프랑수아 비자르는 "스위스에서는 개인이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매우 예외적인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를 영웅이라는 단어로 부르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BBC는 루츠가 부다페스트에서 보냈던 삶을 조명하면서 그가 귀국 후 냉대를 받은 이유에 대해 스위스의 중립국 정책이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분명 영웅이었지만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그가 한 행동이 국가 외교 정책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독일, 헝가리, 미국에는 루츠를 기념하고 있는데 정작 스위스에서는 베른에 그의 이름을 딴 작은 길이 있을 뿐이다.
BBC는 내년에 스위스 외교부에 그의 이름을 딴 공간이 들어선다면서도 여전히 스위스인들에게 루츠에 관해 물어보면 "그게 누구냐"라는 말만 듣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minor@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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